[책 속에 생각을 담다]
피상적인 관계들이 영혼을 약화시킵니다. 그것들은 믿는 자들 사이에서 관계를 세워주기보다 오히려 무너뜨리는 일을 합니다. 그 안에는 상호교화를 통한 따뜻함이 있기보다, 서로 부딪히는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영혼 안에 머무는 사랑은 자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옵니다. 당신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자기의 본성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과 양립하지 않는 모든 것을 몰아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잔느 귀용 글>
일반적으로 인간관계를 보면 매우 피상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 등에서 더욱 피상적인 관계를 발견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인간관계에도 진실과 사랑, 공의에 의해서 관계를 매져야 한다. 이런 관계가 실질적 관계인 것이다. 피상적 관계는 개인을 무시하며, 원칙이 없는 관계와 교제로써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낳고, 소외감을 유도함으로써 속박하려 한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책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진실을 외면케 하고, 거짓 사랑과 가짜 공의를 세우며 진실한 영혼을 파괴하고 약화시킨다.
사전적인 의미로써 ‘피상적’이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겉보기, 수박 겉핥기 등으로 이해하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근본적인 본질을 왜곡시키려는 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을 말한다.
또는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식하는 행동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가 바리새인의 태도를 지적한 것과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식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바리새인의 특징으로 살펴보면, 율법주의에 따른 분리주의와 전통적 유전의 철저한 준수와 진보주의를 볼 수가 있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외식주의, 겉과 속이 다름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였으며, 양반과 천민 제도가 법제화되었으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강조한 시대였다.
지나친 규제와 원칙을 강조하게 되면, 영리한 인간들은 피상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즉 본질적인 면에서 멀어지게 되고, 형식과 외식에 맞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피상적인 태도와 생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의식화가 되어 가고, 외식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본질적인 것에서부터 멀어지고 속과 겉이 다른 태도를 취하면서 피상적인 사고와 태도를 가지게 되고 만다.
예수는 이러한 피상적인 인간들에 대해서 바리새인을 예를 들어 말했던 것이다. 첫째로는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랍비라는 칭함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과 남을 멸시하려는 사악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조차 멸시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도 멸시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선악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근본이 진실하지 못하여 본질을 거부하고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사물의 관계까지도 피상적인 관계를 가지려 한다. 그 한 예를 들면, 어린이들에게 동물인형을 선호하도록 하여 인간관계의 본질을 왜곡시키며, 동물에 대한 피상적인 의식을 갖게 하고 있다. 즉 말하는 동물, 애정(愛情)적 동물, 인격적 동물 등으로 인식을 갖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는 불편하게 생각하게 되고, 동물과의 관계를 매우 친화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피상적 관계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창조자를 부정하게 하고, 진실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갖게 하고, 진화론적 사회에 익숙한 관계를 가지도록 유도하게 한다.
결국은 이런 피상적인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면서 인간적 본질을 부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