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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Jul 20. 2024

77. 이 성전을 헐라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77. 이 성전을 헐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당신이 그것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요한 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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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나서서 행하시기 전에 이렇게 가나에서 결혼식에 물로 포도주를 내게 하신 표적을 먼저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성전 뜰에서 사람들이 제물로 들릴 것들로 장사하는 꼴을 보시고 노끈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버려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그러자 예수의 제자들은 “주의 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고 기록된 말씀을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라.”라고 했다. 이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성전을 헐라!”라는 말씀이었다. 

  이에 대하여 종교적인 해석은, 특히 기독교 신학에 의한 가르침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 다윗이 그렇게 바라던 하나님의 집, 그러나 그 전통을 이어 나중에 헤롯대왕이 다시 건립한 성전이었던 것이다. 이때에 헤롯이 건립한 예루살렘의 성전은 정치적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성전을 용납하시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찾아와 자신의 죄, 허물을 덮기 위해 속죄제로써 다양한 제물들을 즉석에서 돈으로 사서 제물로 바쳤던 것이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종교관을 예수는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것들로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만하라고 말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떠나 동쪽에 거주하면서 두 아들을 낳아 살고 있을 때에 첫째 아들 가인은 곡물로 제물을 바쳤으며, 둘째 아들인 아벨은 양 한 마리로 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 그 두 아들이 첫 제물을 드렸을 때였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첫 제물이었더라면, 분노하기 전에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곧바로 분노했다. 그 분노를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동생인 아벨에게로 향했다.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모세는 철로나 돌로나 나무로나 사람을 죽게 하면 살인자라 하였고, 그 살인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첫 살인자인 가인에게는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긍휼을 베풀지 말고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하라.”(신 19:21)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사랑으로 참으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때문에 모세로 시작된 하나님의 장막은 솔로몬에 의해 웅장한 성전이 되었으며, 여럿차례나 허물어졌고, 예수님 당시에 성전은 헤롯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성전인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집을 거룩히 하셨던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처럼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적인 수단으로만 여겨온 것이었다. 

  이때에 유월절 전날에 성전 뜰에서 인간들의 행각을 보시고 예수는 더 이상 참으시지 않으셨다. 아니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깨우치기 위함인 것이었다. 이제는 더 의미가 없는 성전임을 지적하시고, 예수 자신을 들어 새 성전을 세우게 될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전에 예수 자신이 죽음으로써 유대인의 성전의 의미는 끝난 것이 되며, 친히 예수 자신으로 새 성전, 즉 모세에 의한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는 성전을 유대인에 의해 허물 것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과 더불어 삼일 만에 다시 사신 부활에 의해서 새 성전이 존재케 된다는 것을 말하신 것이었다. 성막과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었다면, 예수님이 세운 성전, 즉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거하시는 성령의 집이 새 성전이 될 것임을 말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인간들은 그 하나님의 집이 될 육신을 왜곡하여 성령이 거하지 못하게 하고는 자칭 말하기를 자존(自存)이니, 자존감이니, 자존심(自尊心)이니 하는 표현으로 아집(我執)과 아성(我城)을 마음에 품어 인본주의 사상과 이념으로 성벽을 쌓아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自存)의 본질은 창조자 하나님의 주신 인간 개개인의 존재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본주의적 사고에서는 자존을 스스로 존재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위해 수많은 이념으로 포장을 해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자존감에는 실제로 자존적 의미보다는 아성의 무게를 더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를 살펴보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엿보았을 때에, 자신의 속셈이 들통났을 때에 심히 분노하며 저항하고 대적하는 행동을 볼 수가 있겠다. 그럴 때에 인간들은 말하기를, “자존심을 건드린 거야~”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아성을 건드린 셈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아집(我執)에 따라 예수를 배척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아성을 든든히 한 자들은 절대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내가 새 성전을 세워 주리라!”

  이런 말씀인 것이다. 삼 년간 광야에서, 들에서 예수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르쳐왔다. 그 하늘나라는 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곳을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 안에 있는 하늘나라를 말하신 것이다. 그래서 추수할 것이 많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를 추수하는 일이 제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삼일 만에 세우는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로마의 구교적인 제도가 자리 잡고 있는 성전만이 거룩한 집으로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그러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새 성전인 그리스도인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동의하시고 역사하심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가라지와 쭉정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비유로써, 양과 염소를, 쭉정이와 알곡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들이여! 아성을 헐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존이 회복되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될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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