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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Aug 05. 2024

78. 문명과 장애인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78. 문명과 장애인     


 自然正常을 낳고, 文明障碍를 낳는다.()     


    요즘엔 유튜브에서 자주 장애인들이 등장하는 영상을 많이 올리고 있는데....... 그것도 특이한 장애인들이 기막히게 살아가는 모습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생활하는 장애인들을 보면 가슴이 쓸어내리는 아픔과 호기심이 동시에 울린다.

  어떤 때에는 의심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일까?’ 그 외에도 희귀한 장애모습, 너무 처절한 모습, 이러한 장면들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 이제는 자주 보게 되니 별로 놀라지 않는다. 이처럼 섬뜩한 영상들이 사실인 듯이 떠돌아다닌다.

  놀란 가슴을 품고 가까운 산을 오르며 마음을 달래 본다. 등산길에 다양한 풀과 나무들이 아무렇지 않게 반긴다. 자연의 모습으로 반긴다. 도시 근처에 낮은 산이라도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풀은 풀로, 나무는 나무로 그리고 그곳에 수많은 동물들이 노닐고 있다. 들꽃에는 나비들이 하늘하늘 춤춘다. 보이지 않는 많은 작은 벌레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지렁이 한 마리가 길 위에 죽어있다. 미처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나 보다. 이처럼 자연에는 원칙이 있다. 그 자연의 원칙은 모든 것들을 정상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것은 제 모습으로 유지되어 있게 되니, 그 아름다움은 한결같다.


  한 아이가 네발로 걸으며 흙을 만지고 지렁이를 만지며 놀던 그때, 그리고 성장하여 큰 아이가 되어 산과 들을 뛰며 돌아다닐 때, 장성하여 성인 되어 높은 산을 오르내릴 때, 그리고 혼이 되어 낮은 산길을 걸어갈 때에도 자연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자연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연에는 정상을 낳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은 회복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날지라도 말이다. 자연은 곧 정상을 회복케 한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에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그대로 가만 내버려 둬라! 알아서 제자리를 찾는다.’


  그렇다. 자연은 제 모습 그대로를 지켜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정상을 낳기 때문이다. 자연이란 뜻, 자연(自然)은 ‘스스로 되다’와 ‘저절로 된’ 그런 뜻이기보다는 ‘되어진 그대로 있다’라는 의미가 더 깊은 뜻을 가진다. 이를 풀어서 성경적으로 해석한다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만든 모습 그대로를 지니고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진화론적 의식에서는 ‘스스로 되어진 것, 저절로 이루어진 것’ 이렇게 인식을 하려 한다.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지혜로운가? 막연한 개념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더 막연한 개념을 내놓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거짓말이 참인 것처럼 하려면 더 큰 거짓말을 해야 비교적으로 참인 것처럼 각인이 되는 것이다.  인류의 시작은 수 억년전에서부터 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자연은 창조자에 의해 존재한다고 하면, 거기에는 많은 지혜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 지혜를 찾으려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법칙과 존재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진화론적 사고에는 그것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더 황당한 것을 내놓아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유사성과 분리와 비교의 대상을 연결시키려고 한다. 원숭이와 인간의 유사성에 의해 유인원을 등장시키고, 서로 다름을 만들어내어 종자와 계열을 형성하도록 한다. 이러한 논리방식은 그들의 거짓을 참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그래서 진화론적 사고들을 절대적인 이념화로 만들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범주를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이념적 사고의 틀로 형성된 탑이 바로 인간의 문명인 것이다. 인간의 문명의 진화와 발전에는 개념의 차이가 있다. 진화는 필연적 과정이겠지만, 발전은 목적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특히 사고능력을 지닌 이성적 인간은 자연세계에서 자연적인 것에 실증과 한계를 느낌으로 변화를 시도하려는 인간의 욕구가 가만 두지 않는다.   원래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다른 동물과 달리 다스리는 권한을 포함하여 자유의지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그러므로 인간은 천지만물을 창조의 섭리에 따라, 자연의 원리에 따라 다스리는 의무를 명령(命令)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태어남은 그냥 자연의 일부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달란트(Talant)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 명령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만 극한 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선악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축복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떠난 후에도 유효한 것이었다. 그들이 에덴동산을 떠나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마에 땀이 나도록 수고하여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도 그 사명은 유효한 것이었다. 그들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은 수고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가인은 농사의 일로, 아벨은 양치는 일로 자연을 다스리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자연을 다스림에 있어서 참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제단에 제물을 하나님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가인은 시기하여 동생을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자 가인은 부모를 떠나 자기만의 영역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에덴동쪽에서 더 멀리 놋(Nod) 땅에  자신을 위한 성의 쌓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첫아들의 이름으로써 에녹(Enoch)이라 불렀다. 결국은 그곳은 가인의 피가 묻힌 후손들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가인의 후손들을 살펴보면, 가축을 치는 조상(야발)이 나오고, 수금과 퉁소를 부르는 음악의 조상(유발)이 나오고, 구리와 쇠를 녹이는 대장장이의 조상(두발가인)이 나온 것이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부터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최초로 피를 묻힌 조상(가인)에서 인간의 문명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그대로 유전(遺傳)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세상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외면하지도 않으시고,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Seth)을 낳게 하시고 그의 후손에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게 하셨던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해주는 성경의 말씀은, 셋의 아들의 이름에서 보여주고 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Enosh)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로써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로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서로 충돌하며 피 흘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통해 문명의 공동체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 국제사회처럼 말이다. 그러한 인류의 문명은 발전해 갔다. 하지만 그들의 타락한 모습도 진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의 아들들이 내려와 인간의 여인들을 탐하고 자식을 낳음으로 인해 그들의 범죄는 더욱 빠르게 그리고 더욱 깊게 진화해 가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로 멸망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문명은 유전되어 갔다는 것이다. 홍수 이후의 그들의 생활을 보면 알 수가 있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노아의 가족들은 포도를 생산하는 농사를 했는데, 이때에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어 먹었고, 취하고 무더워서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것은 첫째는 그들은 홍수 이전의 문명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과 이전보다 날씨가 매우 덥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문명은 점점 발전해 가고 있었으며, 영웅 니므롯에 의해 한 지도자로 구성된 한 나라(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인본주의적 국가관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바벨탑에서 흩어졌어도 같은 언어의 공동체인 여럿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국가관적 의식 속에서 개인의 존재보다는 전체적 공동체의 가치를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즉 인간문명이 체제를 갖추게 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문명은 인간의 존재와 가치의 정상적인 인간성을 하나씩 파괴해 감으로써 인간의 장애(障碍)를 낳게 되고 만 것이다. 즉 인간의 문명공동체에서의 장애인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장애를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 낳은 장애들,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가 점점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문명의 영향력이 심화되고 절대적이 되어지면서 소외장애(따돌림)가 심화되어 가고 있다. 또는 기술문명에 의해 생활의 영향력에 의해 각종 질병과 사고로 인한 신체적 장애도 심화되어 가고 있다. 또한 인간의 문화적 이념에 의해 정신적 장애도 심화되어 가고 있다. 즉 대인관계의 장애, 정체성의 장애, 비인간화의 장애 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명에 의한 장애에는 신체적 장애보다는 정신적 장애가 심각하다. 그러나 더욱 염려가 되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얌전해 보이던 인간이 돌발적인 살인 행위,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하는 언행적(言行的) 관계, 잔인한 게임에 몰입하는 생활 등에서 인간들에게는 비인격적 장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예수의 가르침에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할까? 가정의 파괴에는 부모의 사랑이 변질될 때이다. 국가나 지역사회의 파괴에는 이웃사랑이 변질될 때이다. 인간의 본질의 파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변질될 때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그러므로 자연은 정상을 낳고, 문명은 장애를 낳기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참 사랑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은 탐욕의 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문명은 영원할 수 없게 하나님은 그날을 정하셨던 것이다. 태초에 예정된 추수할 수(때)가 다 찰 때까지를 정해두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날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했던 것이다. 겉보기에는 정상인 같아 보이는 장애인들, 그들은 유튜브에서 외형적인 장애인들을 만들어, 그 영상을 띄워 자신들이 정상인임을 인증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희귀한 장애영상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장애영상들을 열심히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깨달음이 없는, 인지하지 못하는 문명인들은 문명의 장애인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를 깨닫게 하시려고 자연의 모습 속에서 정상이 이루어짐을 보여주시고,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만이 인간회복이 이루어지며 정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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