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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Jul 31. 2024

181. 공허함에서 발견

[책 속에 생각을 담다]

181. 공허함에서 발견


 당신의 연약함과 공허함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가 비록 수치스럽기는 하지만, 또한 감사드릴 수 있는 이유도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허함을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채우실 수 있습니다. 공허함의 시간은 우리가 그분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빵을 받아먹고 있는 것처럼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잔느 귀용 글>

  



  인생은 때때로 연약함과 공허함의 물결 속에 흐름인지도 모릅니다. 바쁠 땐 느끼지 못하던 감정들이 한가한 때에는 공허함과 나약함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괴롭게 하기도 한다.  무신론자들은 술과 도박으로 잊으려 한다. 그러나 일시적일 뿐이니, 반복된 행동을 하거나 중독되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오히려 공허함과 연약함에 처할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분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그분의 필요함을 느꼈기에 그분을 자신의 절대자로 모셨던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 공허함과 연약함에 있을 때에 더욱 주님으로 기쁨을 누렸다. 빵을 주심같이 영혼의 기쁨을 주셨기 때문이다.



  연약함과 공허함? 가만히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이 연약함이라 생각될까? 어린 시절에는 기운이 없고 힘이 없을 때에 연약함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는 연약함이란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재력에 비추어 연약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연약함에 머물 때에는 인간관계로부터 기피하거나 외면당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홀로 있고 싶어 하거나 외로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에 공허함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쉽게 정리한다면, 인간관계에서, 즉 사회관계에서, 어떤 목적이나 위치에서 오는 심리적인 현상에서 연약함과 공허함이 밀려오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러하니 연약함에는 신체적인 연약함과 정신적 연약함으로써 그 근본이 상대적이거나 비교하는 의식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도 하게 된다.

  그렇다. 연약함과 공허함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심리상태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혹시 짐승도, 여기서 동물이라 하지 않고 짐승이라 함은 좀 낮추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이다.

  특히 산과 들을 주로 돌아만 다녔던 나에게는 동식물에 대해서 유난히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쥐 나 바퀴벌레 등에서도 매우 거부적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바퀴벌레는 벌레 중에 하나로만 생각했었다. 또한 쥐에 대해서도 너무나 흔한 일이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었다. 그때에는 쥐 나 바퀴벌레를 매우 관심에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집안에 흔한 동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쥐와 바퀴벌레의 행동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쥐와 바퀴벌레를 잡을 때에 매우 자신감이 넘쳤었다.

  한 예를 들면, 장롱 뒤에 숨은 쥐는 바닥에 있지 않고 조금 위에 올라가 숨는다. 사람들은 그걸 모르니 장롱 뒤의 바닥만 막대기로 휘젓는다. 쥐는 매우 영리해서 참기름뚜껑을 꼬리로 열고 꼬리를 넣어 빨아먹는다. 그러므로 참기름 병이 넘어지지 않는 채로 양이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겠다. 한편 바퀴벌레의 활동은 야밤 12시 전후에 행동을 많이 한다. 그리고 바퀴벌레는 뒤집어지면 돌아서지 못한다. 그리고 바퀴벌레를 파리채로 잡을 때에 알을 밖으로 튀어 내던진다. 바퀴벌레의 알은 팥처럼 생겨서 사람들은 미처 알지못한다. 아니 신경을 안 쓴다. 하지만 알 속에는 백 마리나 되는 새끼로 부화되어 나온다. 이 정도 얘기하면 얼마나 친근한지를 알 것이다. 이러한 쥐 나 바퀴벌레는 절대로 무익한 동물만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연의 일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이들은 인간생활 속에 적응하도록 진화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동물들은 자연 속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때때로 자연의 일시적 변화로 인해 굶주림과 두려움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연약함과 공허함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능에 의해 반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연약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인간도 동물처럼 본능에만 의존한다면, 연약함이나 공허함에 있어서 조금은 덜 느끼지 않거나 외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타인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에 즉각 반응하여 대응하려 하거나 피하려고 할 것이다. 또는 외면함으로 무시당하지 않는 것처럼 하거나 초월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연약함도 공허함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반응하거나 무반응으로 현실을 피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약함이나 공허함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모두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고도 말한다. 첫째는 인간관계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약함이나 공허함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하는 의지를 찾으려고 한다. 둘째로는 환경적 관계에서 존재위치를 인지하려고 한다. 셋째로는 근본적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연에서도 모든 만물이 관계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에서 인간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인간의 본질이 관계적인 데서 근본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이지 않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존재적 의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더욱 연약함과 공허함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만일 연약함이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에게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생물들은 인간처럼 연약함이나 공허함과 같은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만은 그 단계를 넘어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통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인간사회는 발전해 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성숙해져 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찾아가려고 하고 발견하게 된다. 또는 본질적인 근본을 회복하려고 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연약함과 공허함은 삶 속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인간은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도 인간의 연역함과 공허함을 느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백화점에 놓인 마네킹 인간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인지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인지능력이 부족하거나 부실하다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진의를 분별하지 못한다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된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자연의 이치(理致)를 아는데, 들에 핀 들풀조차도 자연의 원리를 아는데, 어찌하여 인간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수가 있을까? 진리가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느낄 때마다 본연의 인간을 돌아보게 되고, 인간의 근본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게 될 때에 마음에 평안을 찾고 기뻐하는 것은 바로 연약함과 공허함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될 때에 연약함과 공허함에서 더 큰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과 공허함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자명종과 같은 것이다. 어두운 바닷속에서 등대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 해와 달이 있고, 별들이 있겠는가? 이들은 인생의 나침판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연약함에 있을 때에, 공허함에 있을 때에 이정표가 되어주고,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환경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자연의 환경을 파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통해 더욱 주님을 발견하게 되고, 은혜를 더욱 깨닫게 되며, 그 기쁨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연약함과 공허함을 통해서 더욱 진실해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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