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 들아!」(마태 6: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 10:29)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누가 1: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 6:26)
~~~~~~~~~~~~~~~ Bible ~~~~~~~~~~~~~~~
아침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어둠의 사십 년’의 책을 펴서 보려고 하는데, 나무 숲 속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간다. 잠시 그 새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 내 마음에서 이렇게 생각이 흘러나왔다.
‘저기 날아가는 새는 자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알고 날아간 걸까? 목적이 있어서 날아가는 걸까?’
그때에 내 이성은 말을 했다. 아니 말하기보다는 생각을 풀어내었다. 내가 이미 알고 풀어낸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스르르 생각을 풀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지식이나 어떤 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풀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바꾸거나 멈추거나 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반박하려고 해도 그 생각은 전혀 멈추지 않고 풀어내고 있었다.
‘저기 날아가는 새는 마치 목적이 있어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따라가면 그 새는 엉뚱한 곳에 이르게 되고, 다시 날아가기 할 것이다. 저 새는 생각이 있어서 날아간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속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무식한 놈!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냥 새가 날아간 거지.’
도대체 누가 무식한 걸까? 의문을 품지 못하고 묻어두는 것과 의문의 해답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이성적인 태도일까? 너무나 큰 의문이거나 깊은 의문에는 이성이 어두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증거를 제시해 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해?’
마치 매우 객관적이고 매우 논리적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진화론의 지식은 과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린아이들에게 사실인양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들이라고 말이다. 하물며 물리학에서도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등속운동과 비등속운동, 즉 가속도운동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연세계에는 등속운동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등속운동과 비등속운동의 이원론적 이념으로 자연의 운동현상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셈법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물체의 운동을 등속운동에 의해 이해하게 되었으나, 비등속운동에 대한 이해조차 제한된 이해로 가고 말았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아라! 얼마나 자연스러운지를 말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이러한 놀라운 이치를 진화론적인 이념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서는 자연발생, 진화, 적자생존, 양육강생 등으로 자연세계를 바라보며 인식하게 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자연과 친화관계를 가지겠는가? 두려움과 정복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래서 산악인들에게는 험한 산이나 거대한 산을 오르려고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까지 산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 산악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정복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저나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 칭기즈 칸 등의 영웅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니겠는가?
인류 최초의 영웅은 하늘이 인정한 니므롯이 아니겠는가? 그는 온 민족을 한 곳으로 모아 한 제국을 세웠다. 이것이 인간의 제국의 심볼(symbol)인 것을 알까? 오늘날에 강대국일수록 제국의 심볼, 즉 상징적 탑, 오벨리스크가 있다는 것도 알까?
이러한 근원의 뿌리는 노아홍수 후에 얼마 안 된 때에 시날평야에 제국을 세운 영웅 니므롯의 정신에 있다고 보아진다.
이처럼 인류문명에는 에덴동산에 선악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들은 선악의 두 바위 틈새로 자라난 교만과 탐욕의 열매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의 교만과 탐욕의 결실인 셈이다.
이런 인간의 문명에의 지식들, 니므롯의 인본사상, 다윈의 진화론 사상, 헤겔의 변증법 사상, 막스 엥겔스의 유물론적 사상 등의 지식들이 향하는 목적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들이다.
이런 인본주의 세계관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이성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탐욕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두려움과 정복하려는 의욕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존재에 대해서 원리와 이치를 분석하고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아주 극단편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학적 원리나 법칙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원리와 법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런 세계관으로 바라볼 때에, 저기 하늘을 날아가는 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할까? 첫째로는 날아가는 비법, 원리를 생각할지 모른다. 둘째로는 사냥하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이런 인간은 사물을 보면, 자연의 존재 가치보다는 소유의 가치를 먼저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을 거부하기도 한다. 또는 인간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은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아시기에 노아에게 허락을 해주었던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세기 9:2,3)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에 창조한 뜻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미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인간의 결과들을 아셨으며, 오히려 인간의 지혜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에 필요한 기름과 석탄과 각 에너지를 창출해 내도록 자료를 미리 제공하신 것이다. 인간의 기술문명을 정리해 보면, 자연시대에서 석기시대, 철기시대, 전자시대, 양자시대로 진화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겠다. 이러한 인간의 문명의 진화를 하나님은 어여쁘게 바라보시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다르다.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세계를 살펴보면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폼페이섬의 멸망, 로마의 멸망 등에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이제 다시 자연에 대해서 생각을 풀어보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동력은 그분의 사랑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이처럼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빛으로 천지만물을 드러내시고, 거기에 물과 물을 나누어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에덴동산을 꾸미시어 아담으로 거기에 살며 관리하게 하셨던 것이었다. 여기서 아담은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정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존재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여자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여자를 한 인격체로 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부라고 고백을 했다. 여기서부터 아담과 여자는 위아래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선악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들었고, 여자에게 말할 때에는 먹거나 만지면 죽는다고 과장되게 말했던 것이다. 결국은 그들은 선악의 열매를 먹음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확인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얼마든지 선한 인생을 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과 탐욕의 길로 가게 된 셈이다. 그 첫 번째 이유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인 것이다.
결국 인간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외면하고 말았던 셈인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는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정복하려고 할 뿐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국제사회를 보면, 지구의 모든 땅을 저마다 차지하고는 국경을 만들고 가인처럼 이웃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악한 짓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디에 있을까? 인본주의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은 두려움과 정복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에, 자유와 평강을 빼앗고, 거짓된 자유와 평화를 외칠 뿐이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세상을, 자연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교과서와 같은 자연세계를 주셨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바라볼 때에,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된다면,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날아가는 새를 보라! 그 날아가는 새의 자유로움, 어디로 날아가는지 새는 알지 못하나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새가 살아가는 생존의 의미를 아는가? 그 새가 자신의 살아가는 의미를 알까? 자연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물론 하늘을 날아가는 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이성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연의 까닭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만일에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이성을 소유했다면, 그 새는 알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디로 갈까? 어떻게 날까? 등등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새들은 그냥 날아간다. 어떤 고민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인간은 이성에 의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의 틈바구니에서 선을 행할지, 악을 행할지 두려움과 갈등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의 이성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아니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이성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은 절대로 관섭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연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운행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다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다 포함한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본주의 세계관에는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분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에는 모든 것을 분리하고 차별하고 개체보다는 집단[종(種), 과(科)]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차별하지도 아니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자연의 섭리 속에 사랑이 있고, 인간 세계 속에도 사랑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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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obelisk): 높고 좁은 사면의 송곳 같은 탑으로써 끝부분엔 피라미드 모양을 한 대리석 탑. 사면에 글자를 새겨있고, 전승과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고, 태양숭배, 태양신 라 혹은 호루스를 의미하기도 하는 높이 30m 되는 탑.(오벨리스크가 있는 국가: 이집트의 카이로, 에티오피아의 악숨,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프랑스의 파리, 바티칸제국의 성 베드로광장, 미국의 워싱턴과 보스턴과 라스베이거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