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글]
이제껏 지나온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와 선하심 덕분임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저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늘 우리 자신보다 그분을 앞세운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르거나 고의적으로 그분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거룩한 자유가 생겨나며,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친밀하게 대할 수 있게도 되고 이런 친밀함 안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 로렌스형제 지음/오현미 옮김>
하나님은 늘 임재하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의 성전에 임하셨던 것처럼, 믿는 자 안에 거하신다. 때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잊을 때에도 주님은 곁에 계신다. 기도할 때에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뜻을 거슬러 행할 때에도 하나님은 멀리 가시지 않고 곁에 계신다. 단지 믿음이 적을 때에 하나님을 잊을 뿐이다. 아니 의심이 주님을 밖으로 쫓아낼 뿐이다.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거룩한 자유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된다.
천지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임재해 계심을 느낄 수 있을까?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인데도 말이다.
마치 AI(인공지능)의 로봇이나 다름없는 문명인 …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고 노아에게 말하신 그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무슨 뜻으로 그리 말했을까? 그때는 아직 천지가 홍수로 인해 거의 피폐해진 자연의 모습을 바라본 노아에게 말이다.
아직 인간들이라고는 노아의 가족뿐인데, 미래에 인간들의 모습을 말하심은, 그들도 노아의 후손들이 아니겠는가?
눈부신 햇살에 눈을 제대로 뜨고 바라볼 수 없는 대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대홍수 이전에 대지에는 울창한 숲과 웅장한 나무와 동물들, 그리고 건장한 인간들이 수백 년을 살아가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아마도 노아는 눈이 부셔서 제대로 대지의 모습을 바라볼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수천 년이 흘러간 오늘에 대지에는 여전히 그때, 노아의 홍수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도, 인간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문명의 이념들로 인식된 눈으로는 대지의 참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문명인들은 교육된 의식에 의해서 바라볼 뿐인 것이다.
그러하니, 어떻게 거룩한 자유를 알겠는가? 이들은 문명의 이념에 따라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자유조차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기에 끝없는 투쟁과 생존에 맹주(猛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서 어찌 거룩한 자유를 느끼거나 인지할 수 있겠는가?
한심한 인간을 빼고, 자연의 만물에서는, 동식물들은 창조자의 지음을 받은 그 모습으로 수천 년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들은 피조물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나무도, 풀들도, 숲 속에 사는 동물들도, 인간이 알 수 없는 모습 그대로 생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자연(自然)이라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피조물의 존재나 가치를 깨닫지 아니하며,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로 어떤 이념과 사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AI-MAN)으로써 문명화된 인간존재로 살아왔었지만, 이제는 그 문명인에서 인공지능의 로봇에게 밀려날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도 천지를 창조하신,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한 번도 인간을 외면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인간세계를 창조주는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인간, 아브람을 선택하여 한 민족을 이루는 역사 속에서 창조주는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셨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모세를 통해서 글로 남기게 된 것이 오늘날에 성경(BIBLE)에 의해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진리를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요한 14:6)
이처럼 너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란, 거룩한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문명에 의한 제한된 자유나 조건적 자유가 아니다. 그런 인간문명이 주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란 것이다. 이들의 자유는 상대적 자유, 즉 남이 누리지 못하는 권한의 자유, 대가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유한적이며, 제한적이며, 종속된 자유, 즉 인간의 제도적인 법, 국가란 거대한 권력 아래에 주어진 법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조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참 자유를 얻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중심의 자유는 인간굴레에서 벗어나게 못하게 한다. 즉 소나 말에 씌운 굴레와 같은 것으로써 인간의 행동과 의사의 자유를 얽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자유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한 참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자유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왔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자유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며, 한 민족을 택하여 약속된 언약을 따라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로 이 땅에 보내어 참 자유, 거룩한 자유를 획득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력이나 강압으로 거룩한 자유를 주시지는 않으셨다. 오직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로 얻는 자유, 거룩한 자유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한 자유란, 약속된 자유를 말함이다. 즉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태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자유인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자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신 자유이며, 인간의 굴레에서 자유를, 문명의 이념에서 자유를, 죄악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이 친히 죽음에서 부활함을 보이심으로써 거룩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이 거룩한 자유는 진리를 믿기만 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