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nd forb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biven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 Matt 6: 9~13 in Bible -
아~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질병을 고치시고,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치셨던 그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마음에 상처를 위로받고, 육신의 고통을 회복받으며, 그토록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평안을 누리었겠는가?
따르는 무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는 산 언덕 위에서 무리들을 앉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된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 복은 참되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은 위로를 받게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되다. 그들은 충만케 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되다. 그들은 긍휼함을 받는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되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를 것이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되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다. [마태 5:3~12]
이처럼 그들에게 복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가르쳤다. 무리들은 그 가르침에 위로를 받았으며, 복된 삶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예수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도 가르치셨다. 즉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맹세하지 마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러한 것들은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세상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종교나 철학을 바탕으로 주술을 외우듯이 하는 신념(信念)들에 넘어지지 말라는 것과 온전히 진리를 깨달아 믿음을, 신앙(信仰)을 지켜가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것은 주술이나 염불이나 묵주와 같은 행위에 있지 않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도록, 지켜가도록 하심에서 주신 기도문이었던 것이다.
첫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았으며…”
이는 무슨 뜻일까?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 아담에게 예시한, 모세에게 예시한, 그리고 선지자들로 예언하신 모든 것이 하나도 어김없이, 빠짐없이 다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이사야 5:16],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 실이시라.”[계시록 4:8],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베전 1:16]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음을 고백하는 믿음을 말함인 것이다. 즉 구약의 모든 말씀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셨다는 고백인 것이다.
둘째,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약속한 장차 오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음을, 도래(到來)했음을, 즉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의미인 것이다. 마리아에 의해 태어난 그때에 이미 그 나라가 임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칠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도 세례요한이 잡혔음을 듣고는 ‘회게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셋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이 말씀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후에, 세례요한에게서 물세례를 받은 후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기뻐하는 자다.”는 메시지를 예수도 듣고 세례요한도 들었으나 그곳에 있는 무리들은 듣지 못하고 우레가 난 줄만 알 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자라는 것이다. 즉 예수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할 자라는 것이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을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예수는 말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내어 그들로 하늘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이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로 진행형으로 가르치셨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을 회복시키심을 보여주시고 기적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여호와의 영에 의해서 들은 말씀인,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 말씀을 예수는 인용(누가 4:18)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수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복음을 가르치시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셨다. 나중에 예수가 하늘로 올라간 후에는 제자들이 예수가 하신 일, 하늘나라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이며, 예수가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 하신 것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주님이, 예수가 다시 오실 그날까지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질 것이다.
오늘날에,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시대에는 세상 이야기들이 어디든지 전해지고 있다. 하물며 복음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닫혀있는 곳이 남아 있으니 그곳에까지 복음이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내어질 때에가 땅 끝까지 복음이 이르게 됨이 아니겠는가?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세계 국제현상을 보면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예수는 기도문을 주셨던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열강 하듯이 성경의 인물에 대해 열광하는 인본주의적인 신앙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예수가 이 땅에 오심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이 땅에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한 믿음을 가지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한 것이다.
그다음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자라면, 세상 일로 근심걱정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인 것이다. 예수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셨고. 내일 일은 내일로, 오늘의 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 거룩한 믿음인 것이다. 또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의 찬송이 있듯이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삶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는 말씀은 아무리 믿는 자라 할지라도 온전하기에는 육신을 가진 자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사는 동안에 가족이나 이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잘못을 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진리를 깨달은 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런 마음은 세속적인 인본주의 이념에 젖은 자들이나 하는 짓들인 것이다. 그런 짓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는 예수는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마태 22:37~40]
이 말씀은 매우 놀라운 진리이다. 왜냐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정하는 모습이며,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며, 또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함에는 저들처럼 악을 행하지 않게 하심이며, 또는 악한 자들로 더 분노하게 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들처럼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해 정의를 논하거나 해명하려고 하면 더욱 악한 마음을 부추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특히 형제간에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이유도 해명이 되지 못하며, 결코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믿는 자가 사랑을 세상에 보일 때에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근본인 사랑을 성립되게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허상과 같은 것처럼 되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사랑도 자녀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자녀는 부모를 부정하거나 외면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일 때에 참 사랑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사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으셨으며, 그 코에 영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여기에 오래전에 쓴 시를 하나 소개하겠다.
[사랑은 행동으로]
사람이 사는 곳엔
사랑이 있다.
사람들 주변엔
사랑 얘기도 많다.
외로운 노인에게도
갓난아기도
사랑의 젖을 먹는다.
십 대들의 꿈속에도
사랑은 요동한다.
먼 나라의 사랑이 아니라
현실 속에 피어나는
살아있는 사랑이다.
동화에 나오는 사랑은
소설에 나오는 사랑은
추억으로 머무는 사랑
참 사랑은 아니다.
부모의 자식사랑도
연인의 사랑함도
생활에서 피어나는
향기로운 사랑이다.
사랑은 이상도 아니다.
사랑은 꿈도 아니다.
사랑은 오직 행동으로
맺어지는 열매일 뿐이다.
다음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말씀이다. 인간은 본시 선악의 양심을 지니고 있게 되었다. 천만다행한 일이 아닌가? 만일에 선악의 열매를 따먹고 나서, 그 마음에 선악의 분별력이 없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함만이 있었다면, 가인처럼 아우를 죽이는 일이 빈번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간의 속성에는 양심이란 키가 있어서 선악의 분별하려는 의지가 있으니....... 그나마 세상이 큰 불행 없이 그럭저럭 흘러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 또한 악의 세상인 듯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이 살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초에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빛이 나타나니 어둠과 빛이 나뉘어 어둠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라 하였으니 말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선악의 파도 속에 인간들이 살아갈 뿐이다. 그것도 유일하게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만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행적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악의 근본인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치 꿀의 단맛에 빠져서 자신이 위험에 처한 줄을 모르는 곰처럼 말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가 뭘까? 수많은 철인들이 떠들었다. 하지만 정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허무주의에 이르러지게 되었고 에밀 뒤르켐 등장하여 자살철학까지 도입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처럼 결과를 낳는다면, 창조주의 존재가치도 허무주의로 결말을 내고 말 것이다. 또 그러한 세상이라면, 인간들이 굳이 애쓰며 살 이유가 있겠는가?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이 그러하다면, 인간의 비극은 극치에 이루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잠시 자연을 살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미물(微物)인 생물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아무 의식도 없이 사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창조주의 섭리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물며, 만물의 연장이라고 자칭 부르짖는 인간들이 미물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태어나고 생각하고 행하는 인간의 업적(業績)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단지,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과 다르게 창조적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놀라운 업적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업적들, 작품들은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는 만족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즉 보기 좋다(It's good!). 창조주는 자신의 창조의 세계를 헛되게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에게서 인생이란? 선악의 열매와 같이 인생의 열매를 보시기 위함인 것이다. 유일하게 인간에게는 삶의 결과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달란트에 대한 이야기를 깨닫게 된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마태 25:15)
이처럼 인간의 인생에는 그들만의 달란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악한 인간은 이러한 인간의 달란트를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니므롯의 제국처럼 인간을 통제하고 개인의 가치를 말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각각의 달란트에 따라 그 인생의 심판을 받게,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중에 인생에 있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인간들이 서로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보다는 관계에 의해 치러지는 일들 속에서 시험에 들게 되고 악한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 속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는 확신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속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살면서도 믿음, 하나님께 향한 믿음,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문을 묵상하라는 것이다. 즉 주님이 주신 기도문은 성경 전체를 잘 드러낸 말씀인 것이다.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할 때마다 성경 전체의 말씀을 되새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주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성경말씀이 집약된 말씀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더욱 믿음을 지켜갈 수 있기를, 더욱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깊이 관계를 유지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