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다

[知言-욥기]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2.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다


깨달음을 주는 성경구절[욥기 9장]

〇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2절)

〇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15,16절)

〇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34,35절)


깨달음의 글

욥의 친구 빌닷은 죽은 자식은 주께 득죄한 것이니, 그 죄에 붙이신 것이라 하였고, 하나님은 순전한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아니하니 악인의 장막은 없어진다고 했다. 또한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고 빌면 청결하고 정직하다면 너를 돌아보아 의롭게 하여 집이 형통하게 할 것이라 했다.

욥은 그러한 것을 알지만 사람의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였다.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고 말하고, 누가 하나님을 강퍅하게 하고 그를 거역하여서 형통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누가 깨달아 알겠느냐? 그가 땅을 움직여 밀어낼지라도,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고 하늘을 펴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칠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다.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행하시고,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욥은 말했다.

이러한 그분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냐고 그에게 물을 수 있겠느냐? 또한 누가 감히 그분과 변론할 수 있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분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라고 욥은 실토하였다.

또한 욥은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신에게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는 겉으로 선한척하거나 고통을 바꿔 즐거운척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무죄하다 하지 않는 줄을 안다고 했다.

이처럼 욥은 너무나 하나님을 잘 알며 매우 정직한 사람이다. 욥이 두려워함은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죄하여 버리실까 함이다.

오늘날에 그리스도인이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은 거룩한 척하는 것이며, 선한 척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니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욥은 자신의 신앙으로 말해주고 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은 욥이 혹시 죄가 있지 않나 의심하였고, 만일 의롭고 순결하고 정직하다면 하나님께 강구하고 빌면 다시 의롭게 하시고 형통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것은 잘 안다고 했고, 자신의 고통으로 불평하거나 얼굴의 빛으로 즐거움을 나타낸들 주님께서 무죄하지 않으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무죄하다 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의로운 자라 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고통스러우면 괴로워하였고, 형통함을 깨닫고 항상 감사할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순전하고 정직한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순전한 삶과 정직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에 나가도 순전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면 믿음은 헛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극치를 무(無)와 허(虛), 공(空)을 들어 말한다. 그들은 단지 그림자만을 깨달은 것이기 때문이다. 참의 흔적은 보았고, 진리의 그림자만 보았으니, 거기에 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解脫)한 그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직하였다. 그러나 거짓 기독교인들은 깨달은 것도 없고, 깨닫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깊은 신앙을 터득한 것처럼 속이고 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자보다 죄가 더 크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단상의 글]

욥기서를 읽는 가운데에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람마다 다양한 표현들을 말한다. 아니 설교 중에서도, 교인들 중에서도 다양한 표현을 말한다. 그중에 가장 많이 표현하는 말은 욥의 고난의 가치를, 또는 고난 끝에 축복을, 속담에서도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말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은 스스로 역경을 이겨낸 승리자처럼 쉽게 떠들어 된다.


<우리말의 속담: 고진감래>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 폭풍 뒤에 고요가 온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생 끝에 기쁨이 온다. 등등.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닌가? 이처럼 사람의 말에도 큰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에 유행하는 위선, 실수하는 자에게 응원으로 보내는 말,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등등이 집단속에서 자연스럽게 울려 나온다. 그래서 많은 공감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수하거나 실패를 하면 책망하기보다는 격려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로 힘을 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정말 진실성이 있는 걸까? 이처럼 인간사회에서는 결집성(結集性)과 군중심(群衆心)이란 묘한 흐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고독한 군중」(데이비드 리스먼 글)에서는 변화하는 미국의 성격에 대한 글이지만, 점차적으로 선진화하는 국가에서나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현상들인 것이다. 또한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에서는 라다크가 관광지가 되면서부터 젊은이들이 떠나가고 평화로웠던 마을이 곤핍한 환경으로 변해버린 사회현상을 고발하듯이 쓴 내용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문명은 매력적이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문명의 변천은 마치 방정식처럼 희비극의 극대화의 쌍곡선을 그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사회현상은 얼마든지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행복은 천천히 와서 쏜살같이 떠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욥이 당한 재난은 그렇지가 않다. 일반적인 재난들, 사업파산이라든지, 가정파탄이라든지, 시한생인생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욥의 재난과는 너무나 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 고난, 재난 등등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하며 원망과 분노를 토하는 사람들에게서 잘 살펴보면, 자신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를 하나 든다면, 에덴동산에 있었던 두 사람, 아담과 여자(이브)를 들어서 설명을 해보면 이렇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동산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거기서 아담은 사랑할 여자를 얻게 된다. 그리고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그들은 알몸으로 자연스럽게 동산을 거닐며 온갖 열매와 다양한 식물을 취하여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의 나무에 있는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 아담은 직접 하나님께 들었고, 이브는 아담을 통해 들었다. 아담은 직접 하나님께 들었다.


“동산에 각종나무에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그러나 이브는 아담에게 들었다.


“동산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3)


이처럼 아담이 들은 것과 이브가 들은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왜였을까? 여기서 인간의 속셈이 보이게 된다. 즉 아담(인간)은 먼저 난자로서 이브 앞에 허세를 부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아담의 허세가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의 세상에 근본이 된 셈이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이 세상은 남자들의 세상(The world of Adam)이라고, 그래서 인류역사는 남자 중심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렇게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이 흔히 말하지 않던가? 그래서 남녀차별이 에덴동산을 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남녀차별이 선명하게 드러낸 시대는 이씨조선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중동지역에 이슬람국가에는 아직도 남녀차별이 지배적인 셈이다.

욥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인간의 문명이나 인류역사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말해보았다. 즉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 아담의 태도를 살펴보면, 아담은 하나님 목전에서 자신이 선악의 열매를 먹은 이유, 핑계를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어 내가 먹었다.”(창 3:12)


아담은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가 진정 여자를 사랑했다면,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게 줘서 먹었다고 했거나, 내가 여자를 잘 지키지 못해서 먹게 되었다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 왜 아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가? 즉 인간의 본능에서는 아담의 심성의 업보가 내려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바울이 말했듯이 의인은 없다고 했듯이,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가 없으며, 스스로 선한 자가 될 수가 없으며,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욥기에서 친구들의 태도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욥도 절대로 자신이 의롭다고 하지 않았음은 그가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결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인정함을 받은 것이다.

욥의 이야기는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니 오늘날에 많은 인간들이 품고 있는 사상에서처럼,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의롭다 함을 인정하신 하나님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사단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욥은 하나님을 잘 알았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쉬지 않았으며, 그이 삶이 거짓이 없고 간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순결하고 정직하였기에 그이 부유함에도 부정함이 없었다. 그래서 사단이 말하기를 그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에게 복되게 하시고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기복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종교들은 다 그렇다. 기복신앙에 기초한 종교들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세운 종교에는 교리와 제도로써 인간을 지배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종교의 신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도록 했다. 그러한 인간의 종교성이 기독교에까지 스며들어서는 성경의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는 진리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다. 즉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잘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근본이시며, 인자한 분이시다.

욥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당한 재난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가 있겠는가 하고 대답을 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욥은 자신이 순전하고 정직한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토록 하나님이 인정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를 무죄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 오직 그를 순결하고 정직함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 참 많다. 스스로 정직하다고 외치는 사람도 많다. 하물며 모든 권력을 가진 자중에는 자신을 신격화해서는 인간 위에 군림하는 폭군들이 역사에서 볼 수가 있겠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의 네로, 독일의 히틀러, 소련에 레닌, 북한의 김일성 등등. 그렇지만 역사 속에 군주들, 왕들도 제외는 아닌 것이다. 그들은 결코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다. 왜? 그들도 역시 권력으로 인간들에게 악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끝맺음으로, 욥의 신앙은 어떠했을까? 그는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인생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결하고 정직하다 인정받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재난을 당함에는 어떤 부정도 핑계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재난으로 인해 오는 고통스러움에 한탄을 했을 뿐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차라리 모태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인생이 무엇이겠는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떠난 후부터 인생에는 고난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축복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죽지 못하는 고통의 인생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것인 셈이다. 욥이 아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인간의 두려움은 죄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예고하셨던 것이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해법인 셈이다.

앞으로 좀 더 욥의 신앙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게 되기를 바라며 여기서 글을 맺겠습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자유하게 될 것이다.”(요한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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