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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知言-욥기]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1.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깨달음의 말씀 - 욥기 3장]

“그 밤엔 새벽 별들도 빛을 잃고 기다리는 날이 새기를 기다려도 밝지 않고, 동이 트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밤이 내 어머니의 태의 문을 닫지 않았고, 내 눈앞에서 고난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9,10)

“거기는 악인이 소란을 멈추고 지친 사람들이 쉼을 얻으며, 갇힌 사람들이 함께 쉬고, 억압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다. 거기서는 작은 사람, 큰 사람이 함께 있고, 종이 그 주인에게서 놓여 있지 않는가!”(17~19)

“내가 먹기 전에 한숨이 나오고, 내 신음이 물처럼 쏟아져 나오는구나.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닥쳤고, 내가 무서워하던 일이 내게 일어났구나. 내게 평안도 없고, 쉼도 없고, 조용함도 없고, 그저 고난만 와 있구나.”(24~26)


[깨달음의 글]

욥은 순식간에 재산과 자녀를 잃고, 몸도 악창이 가득하여 고통 속에 번민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그가 악창이 들어 고통하는 것을 보고 아연해하고 있던 차에 욥은 스스로 부르짖어 말하기를 자기가 태어났음을 원망하고 있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아 주지 말았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자연의 축복을 한탄하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었더라면 이러한 고통도 몰랐을 것이라 하였고, ‘거기서’라는 지시대명사를 통해 볼 때에 욥은 내세의 세계를 아는 것 같다. 거기서는 악이 그치고, 평강이 있고, 차별이 없고, 메임도 없다고 하였다. 단지 욥은 현실의 고통을 참기 힘들어하고 있다. 그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고 앓는 소리가 물이 쏟아지듯 하다고 했다.

그런 욥은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죽음을 두려워했는가? 만일 욥이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적은 연고일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욥은 그 두려움이 이미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고통일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그들은 어둠을 두려워하고, 사후의 일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현세에 있어서 죄를 무의식 중에라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다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지 못해 고통이 연속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 그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저주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진정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부정허간 저주하게 될까 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근본을 한탄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태어나기 전의 복된 세상을 알고 ‘거기서’라는 대명사로 그 세상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러한 욥의 고백적인 울부짖음은 더욱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는 외침으로 들렸고, 하나님께 향한 간구였던 것이다.

사단은 욥이 육의 고통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리라 생각하였다. 사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욥은 결코 사단의 생각대로 하지 않았고, 더욱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간구하였던 것이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워할 것은 고통과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오래전에 믿음의 형제자매들로 함께 문서선교를 시작했었던 때가 떠오르게 된다. 아마도 그때는 1991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년간 뜻깊은 믿음으로 「섬기는 삶」의 제목으로 격간으로 문서지를 발행을 해왔었다. 그리고 문서연수를 위해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을 방문해 대천덕 신부님과 함께 은혜의 시간을 가졌던 시절도 생각이 난다.

그렇게 문서선교를 하다가 여의치 못해 중단하게 되어 가슴이 메어지던 차에 인터넷으로 다시 문서선교를 시도하게 되었을 때에 첫 메시지가 욥의 신앙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다시 그때에 썼던 욥기의 문서지를 책으로 묶어낸 것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글 중에서 오늘의 글로 나누고 싶었다.

성경에 등장한 욥기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어떤 신학자는 욥기서의 배경은 노아 홍수 이전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는 어떤 신학자는 설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믿음으로는 욥기서는 설화도 아니며, 노아홍수 이전이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모세가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썼듯이 욥기서도 역시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있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거짓됨이 없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신화적인 분이 아니며, 실존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유일하게 진리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오늘의 욥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이건만은 진리라고들 현인들이 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들로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겠다. 그중에 욥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욥을 인정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 번도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외면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욥기 첫 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이다.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욥을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들이 일곱, 딸이 셋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매우 부유한 재산을 가진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하늘의 영들이 하나님(야훼) 앞에 모였는데, 거기에는 사단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단에게 묻기를 ‘너는 어디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왔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인간세계를 넘어 우주적인 세계라 할까? 그런 상황을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이처럼 인간세계의 밖에 이야기를 욥기에서 보게 되는 것이 얼마나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사단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아셨으며, 또한 사단의 생각을 아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단의 마음을 읽으셨기에 욥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은 무슨 짓을 했을까? 그것은 세상에 인간들을 살피고 돌아다니며 유혹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행동에 한계를 느끼게 하시려고 욥의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을 내놓으셨던 것이라 생각한다. 역시 사단은 호언장담하듯이 말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소유를 감싸주시고, 모든 일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를 내쳐보시면 그는 목전에서 당신을 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그럼 네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그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던 것이다. 사단은 곧바로 욥을 치기 시작을 했다.

먼저는 그의 소유를 먼저 쳐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이 자식들을 쳐냈다. 그리고도 모자라서 그에게 욕창이 생겨 괴롭혔다. 이토록 순식간에 일어나는 재난을 우리는 늘 뉴스를 통해 보도를 들을 때마다 혀를 찰 정도로 애통하게 생각한다만, 욥처럼 날벼락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갑자기 일어난 환란을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라는 것을 말이다. 그만큼 그의 고통은 하늘을 찌르는 정도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 호소를 했다. 죽기보다 힘든 고통을 말이다. 오늘날 이런 고통을 느껴본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도 역시 그런 고통은 아니지만 삶의 고통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통을 이기지 못해 타협하거나, 피하려고 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그랬을 것이다. 종종 그런 사람은 보았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보도를 통해 듣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붙잡고 계신 분이 있었다. 그분이 바로 욥이 의지하는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 있게 욥에 대하여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욥에 대하여 보다는 욥의 태도, 신앙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것에 대해 비관을 했다. 그리고 그는 죽었으면 할 정도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었다.

이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들이 산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악한 자에게 굴복하거나 협력을 하는 인간과 악한 것에 저항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잘 아는 하나님과 사단을 욥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두려워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려는 인간, 윤동주의 서시에서처럼 말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처럼 영혼이 맑은 사람은 윤동주 시인처럼 불의에 대해 괴로워하며 욥처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즉 선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에 대해 예수는 산상에서 무리들에게 가르칠 때에 한 말씀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그들에게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마태 5:4)


이처럼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청결하고 애통함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욥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 청결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을 신뢰하듯이, 또한 욥이 순결하고 정직함에는 하나님을 아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며,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은 인간의 결정과 선택을 지켜보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두려워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거두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였기에, 믿음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어떠한 고통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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