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정의 기초

[독서와 생각 3편]

by trustwons


4. 우정의 기초



우정은 존중과 예의에 기초한다. 그런데 존중과 예의는 밀접함에 근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필요로 한다.

이때 거리 두기는 타인의 개별적 주체성, 이를테면 개별적인 욕구와 필요 그리고 그 사람의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을 인정함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의 시간과 공간, 욕망을 강제로 침범한다고 치자. 그것은 육체적 학대 못지않은 심각한 폭력이다. 그만큼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공간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정의하는 개인주의적 개념의 핵심이기도 하다. 사회적 공간은 상징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측면이 있으면 주로 몸짓, 자세, 말 등을 통해 드러난다. 사회적 공간은 동시에 물리적인 것이기도 해서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거리를 통해서도 관찰할 수 있다. 용납이 가능한 신체적 거리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함과 평등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앨런 맥팔레인 지음>



우정은 인간사회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사회란 바로 우정에 기초를 둔 사회이다. 우정은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인간관계에서 싹트는 아름다운 열매인 것이다. 비극적인 사회는 비틀린 우정들로 가득하다.

참다운 우정에는 존중과 예의를 기초로 한다. 존중은 개인에 대한 최상의 가치이다.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신의 명령이다. 예의란 인간상호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며 약속인 것이다. 모든 법과 질서는 존중과 예의라는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법도 질서도 선의 제도가 될 수 있다. 우정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친밀함과 평등함을 이루는 힘이다. 아이와 노인 간에도, 남녀 간에도 권력과 재력 간에도, 유식과 무지 간에도 우정은 친밀함과 평등함을 만들며 아름다운 천국을 만들어 준다.


[단상]

그렇다. 우정(友情)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경우든, 조건이든, 어떤 위치이든 모두 초월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우정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 있을 때, 보통 친구(親舊) 또는 동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슬픈 일이 있는데, 순수 우리말인 ‘동무’라는 언어가 이념화에 노에가 되어, 또는 북한의 공산사회에서 호칭으로 많이 쓰게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친구’란 용어에 있어도, 순수한 언어로써 의미가 사라지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친밀과 평등이 자취를 감추고 힘의 원리에 의해서 또는 집단적, 이념적 구심점을 갖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사회에서 많이 듣게 된다.

그 예를 들면, 조폭들이 집단적 폭력을 쓰면서 피해자에게 ‘우린 친구지!’라고 보도되는 것이나, 정치적 논리에 있어서도 동지(同志)이니, 우정이니, 친구라는 표현을 통해 당력(黨力)을 과시하거나, 선거 때가 되면 마치 국민과 가까운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는 친구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누가 12:4)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요한 11:11)

또한 성경에서도 친구관계에 대해 많은 내용들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이다.”(야고보 2:23)

“너, 이스라엘, 나의 종, 너, 내가 뽑은 자,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야.”(이사야 41:8)

“야훼께서는 마치 친구끼리 말을 주고받듯이 얼굴을 마주 대시고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출애33:11)


이처럼 ‘친구’라는 단어에는 어떤 조건도 넘어서는 놀라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정(Friendship)은 친구 사이에서만이 허용되는 뜨거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물며 예수님도 그리 말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13)


그리고 예수는 친히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에 그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도 예수도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제자들이나 어린아이까지도 친구로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에 그를 친구로 삼으셨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홀로 있는 게 안쓰러워 친구 될 여자를 만들어주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담은 그 여자를 보고 뭐라고 고백하였는가?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 말이 씨가 되어 인류에 남자들은 여자를 얼마나 학대하고, 몸의 일부로, 욕망의 도구로 부려오지 않았는가? 여전히 지금도 중동에서는 여자에 대해 얼마나 제한(制限)을 두고 학대하지 않는가? 이씨조선에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므로 ‘계집애’란 용어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여자는 씨받이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사극에서도 당당히 연출을 보이지 않는가? 그뿐만 아니라 세상에 인간들 중에는 인간을 친구가 아닌 종으로, 또는 도구로, 가축으로 여겨서 수없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역사가 많지 않은가? 이것이 인간의 원초적 악인 것이다. 그런 말도 하지 않는가? 남녀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여자는 남자의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에 살인 셈이란 인식이 앞서기 때문이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도 예수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친구로 나타나 주고 있다. 세상에 어떤 종교에서 신이 인간과 친구관계로 인식되던가? 철저히 지배적인 관계로써, 신은 두려운 존재로 각인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권력자들은 인간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부리지 않았는가?

다시 돌아와, 손녀딸인 릴리에게 편지로써 우정에 대해 말해주는 할아버지의 진정성에는 참 존경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 이씨조선의 후예들은 여전히 남녀차별을 버리지 않았으며, 손녀딸이 아닌 손자아들에게만 각별히 대우하고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만 시댁으로부터 대우를 받아왔던 지난 세월에 얼마나 여자들의 한이 컸겠는가? 그래서 고부간에 갈등으로 희생해야만 하는 며느리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친구란 의미가 또래끼리에서만 쓰여지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이 차이에서나 지위관계나 선후배 사이에서 친구라는 말을 했다간 호되게 혼나자 않았던가? ‘어딜 누굴 친구라고 해?’

릴리에게 우정에 대해 말해주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부럽고 부끄럽지 않던가? 친구도 우정도 동무도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인본주의적 진화론적 사회가 딱 들어맞는 사회가 이씨조선 오백 년의 후예들……. 그래서 어느 외국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쓰레기 속에서 장미를 기대하는 정도라고 말이다.

참으로 슬픈 이 나라, 찬란했던 조선의 역사, 단군의 사상이었던 ‘홍익인간’의 정신을 사라지고, 유교 문화적 바탕으로 전통의식을 이룬 동방의 예의적 국가, 자칭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하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들어왔었다. 그것도 자칭 지식인이라는 자들로부터 말이다.

여기서 끝으로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인도의 석가모니는 백성을 친구처럼 생각하여 지위를 버리고 평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곤고한 인생을 체험하고 깨우치려 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이스라엘의 제일 작은 마을에서 마구간에서 태어나 일생을 우매한 백성을 깨우치려고 목숨까지 바친 것에서 두 분은 백성을, 인간을 친구로서 사랑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우정은 친구관계로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며, 우정은 가장 큰 사랑의 의미를 가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릴리의 할아버지는 우정의 기초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동방예지국의 위선을 버리고 좀 더 진실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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