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3편]
친구는 마치 자석과 같다. 서로 끌리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다시 떨어지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발레나 무용처럼 균형을 잡는 기술이 필요하다.
또한 우정은 자생적이면서 동시에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정은 행복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찾아오며 억지로 얻을 수도 없다. 우정은 흔히 다른 것에 관심을 갖다가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어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좋아한다.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우정은 바쁘고 개인주의적인 삶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극복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우정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친구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며,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면서 남을 돕는 기쁨도 얻는다.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앨런 맥팔레인 지음>
동물들에서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르게 우정과 사랑으로 관계의 힘이 존재한다. 우정도 사랑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에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지나친 접근은 불쾌감을 주며, 너무 멀리하면 소외감을 준다. 인간에게는 우정=친구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어도 우정은 필요로 한다. 우정은 울타리와 같다. 홀로 있는 것을 하나님은 선하지 못하다고 하셨다. 인간이란 의미가 곧 관계적 존재를 말한다. 우정은 이러한 관계에 윤활유와 같다. 서러 돕고 도와주는 것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단상]
참으로 인간은 유별나다. 어찌 보면 신처럼 행사하려고 하고, 어찌 보면 짐승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철인(哲人)이라는 분이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의 합성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말한다. 어찌 보면 맞는 듯하다. 한창 철학 강의를 즐겨 듣고, 철학책들을 열심히 읽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성경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된 후에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은 성경의 전도서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학원을 포기했었다. 즉 그들의 철학적 이론들은 위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는 그나마 진실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를 존경한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설교자의 소리 중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에 동조했었다. 하지만 불교는 사실 석가의 뜻이 아니었다.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방대한 불교적인 이념들을 생산해 온 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깨달음의 철학으로서 불교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의 제자들로 인해 놀라운 신앙의 공동체로써 그 시대에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을 했다. 제 삼의 민족으로 존경받을 만한 민족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로마의 기독교로 세움을 받으면서, 권력과 재력으로 막강한 종교화로 변질되었다. 그 당시에는 로마 기독교라 불렀었다. 그러다가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나 구교와 신교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생명을 잃게 된 암흑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는 서로 존중하게 되어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은밀하게 서로 간에 교류와 협력과 일치를 위한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할지라도 암흑시대처럼 서로 선악의 심판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된다.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또는 성령의 깨우침을 체험했다면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까지에서 놀라운 가르침이 있었고, 더욱 놀라움은 기도문을 주셨는데, 이 기도문은 성경을 아우르며, 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요약한 말씀인 것이며, 이 기도문만을 늘 묵상하면서 기도하며 깨닫는다면, 이는 예수를 알며 하늘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아멘.」
여기까지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기도문이었다. 예수님이 이 기도문을 주신 뜻은 무엇인지 아는가? 이 기도문은 성경 전체를 아우르며, 또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것을 아우르는 말씀을 압축하신 것으로써, 그리고 이어서 세심하게 자세하게 그 뜻을 풀어주셨다. 그리고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한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라.”의 말씀의 뜻을 아는가? 악한 자에 맞서면 더 악하게 대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다. 성령이 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고유한 특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심에도 신과 짐승의 이중성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진화론자들은 모든 생물을 하나의 줄기로써 엮어놓으므로 생물의 진화설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즉 한 작은 생명이 발생하면서부터 끝없이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엄청난 왜곡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화론의 뿌리는 유사성의 이념에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유사성 이념은 창조의 개체성과 고유성을 파괴하려는 이념인 것이다. 즉 존재의 가치와 창조물의 조화의 섭리를 파괴하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진화론의 무서운 논리인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끝없이 살육하고 지배하는 공포의 역사로 이어져 온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세상의 악함을 그대로 두지 아니하신 하나님은 이미 이런 세상을 아셨으며, 그런 세상을 치유할 수 있도록, 자연 속에서도 회복의 힘을 심으셨으며, 인간사회에서도 회복의 힘으로 사랑, 우정 등을 인간에게 심으시어, 가정에서와 친구에게서 회복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이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사랑과 우정은 매우 뜻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모태에서부터 280일간을 모성애(母性愛-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로써 사랑의 힘을 보여주셨으며,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우정(友情)으로써 인간사회의 정상화를 이끌어가도록 해주셨다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대해서는 그 놀라움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령이 그 이치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우정’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량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생명들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귀함 그리고 생존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물리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힘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 그리고 강한 핵력(강력)과 약한 핵력(약력)의 4가지로 보고 있다. 이러한 힘들은 상호작용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관계에서도 사랑의 힘과 우정의 힘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정에서 형제간에서 이루어지며, 우정은 인간관계에서 친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개념으로서, 같은 또래에 극한 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에를 친구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즉, 노소남녀의 관계에 있어서 친구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남녀지간에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게, 복잡하게 인식되는 것은 진화론적 인식현상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남녀의 사랑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진실하지 못한 사랑과 우정을 내포하였기 때문에 상호 의심과 오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과 우정에는 근본이 진실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사랑과 우정을 잘 표현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