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강인은 고민 끝에 가족들과 상의하기로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하늘이 부모님께 강인은 상의를 하였다. 그리고 하늘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강인이와 결혼하기 전에 하늘이가 살던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연립주택에서는 학교와 공원이 가까워서 광일이 혼자서도 학교에 갈 수 있고, 하늘에게도 익숙한 집이라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광일이가 7살 되던 해의 가을에 하늘이와 강인이는 옛집으로 이사를 갔다. 신혼생활을 한 더스카이 아파트를 전세로 주고서 용산구에 있는 옛집인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하늘은 모처럼 옛집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집안을 여기저기를 어루만지면서 살폈다. 하늘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고 생각을 하는 듯이 보였다. 강인이도 하늘을 따라다니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안방과 작은 방이 두 개가 있는 재래식 건물이지만 넓고 편안하였다. 강인은 이사 오기 전에 옛집의 화장실과 거실을 다시 꾸몄다.
하늘이 부모님들도 다시 옛집으로 돌아온 것을 매우 흡족해하셨다. 단지 강인이가 출근하기에는 조금 불편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강인은 하늘이와 부모님을 위해서는 매우 흡족해하였다. 광인은 엄마가 살았던 집이라는 말에 신기해하면서 집안에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살피고는 거실과 베란다도 살피고 부엌도 살피고 그리고는 마당으로 나와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런 광일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시며 광일 뒤를 졸졸 따라다니셨다.
그리고 그 해를 넘기고 겨울을 보내고 봄이 찾아왔다. 광일은 엄마 하늘이와 함께 종종 공원에 가곤 했었다. 봄이 찾아와서인지 개나리들이 예쁘게 꽃을 피웠다. 광일은 개나리꽃을 한 아름 따와서는 엄마에게 드렸다. 하늘은 무슨 꽃인지 볼 수는 없었으나 꽃향기를 맡으면서 무슨 꽃인지를 알아내었다.
하늘은 개나리 꽃다발을 손에 들고는 광일을 품에 안았다. 광일은 좀 쑥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광일은 엄마의 품 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사랑해요.”
광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하늘은 가슴에 울려오는 광일의 음성을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광일을 더욱 힘껏 안아주었다. 광일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것을 하늘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 광일에 대해 잊지 않고 있었다.
주님이 하늘에게 광일을 아들로 주셨음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늘은 자신이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에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에 하늘은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들었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의 소리도 들었고, 그 외에 다양한 소리들을 들었다. 그리고 출산할 때에 하늘이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는 어둠뿐이었다. 그런 하늘에게는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을 느꼈으며, 가끔 어머니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었다.
그런 후에 하늘은 차츰 어둠 속에서 평안을 찾았고 광명을 보았다. 하늘은 조금씩 천천히 주변을 알아갔으며, 어머니의 신앙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 하늘은 점자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유일한 대화의 벗이 되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하늘은 성경을 거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게는 성경은 유일한 대화의 벗이었고, 선생이었고, 언어였던 것이다. 하늘은 종종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나누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적인 언어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하늘에게는 이제는 아들 광일에게서도 주님처럼 느낄 수 있는 관계가 생긴 것이었다. 하늘이가 광일을 임신했을 때에 주님은 하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아, 이제는 나를 대신할 아들을 너에게 주었단다. 그 아이가 너를 기쁘게 할 것이다.”
하늘은 오늘 광일이가 개나리 꽃 한 아름 가져와 주었을 때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품으로 아들 광일을 끌어안았던 것이었다. 하늘은 주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왔었다. 이제는 아들 광일을 통해서 하늘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 여인의 어둠의 사십 년 인생 중에서>
세상에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었을까?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여인은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 에덴을 떠나 광야와 같은 들에서 살아갈 때에 얼마나 곤고한 인생을 살아갔을까? 거기에다 아담은 여인을 통해 첫아들인 가인과 다음은 아벨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으니, 둘째 아들인 아벨은 형인 가인이 돌로 쳐 죽인 일과 그리고 떠나간 가인으로 얼마나 곤고함을 느꼈을까?
그러나 그런 곤고한 인생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다. 가인의 5대손인 라멕은 두 여인을 거느릴 정도로 매우 강한 자였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은 매우 유명하였다. 그의 한 여인, 아다에게서 하나는 가축을 치는 조상이 된 야발을 낳고, 또 하나는 수금과 퉁소를 부는 음악의 조상이 된 유발을 낳았고, 그리고 다른 여인, 씰라에게서 대장장이의 조상이 된 두발가인을 낳았던 것이다. 그러니 라멕의 집안은 매우 대단한 집안인 것이었다. 그런 그가 상처를 받았다고 한 어른과 아이를 죽였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가인의 후손들의 이야기가 끝난다.
이러한 가인의 후예들처럼 홍수이전에는 땅 위에 번창했을 것이며, 그들은 끝없는 곤고함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에 번창한 인간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까?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 아담의 죄악성(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교만함)의 업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벗어날 수 없었다. 불교에서는, 아니 석가모니에게서는 이러한 인간의 곤고한 업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길)을 찾고자 하였다. 그런 석가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는 이 깨달음, 득도(得道)를 천민들에게 전하려고 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처럼, 깨달음은 자신 안에 있으니 남을 믿지 말고 자신 안에서 답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보고 듣고 하여도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참 소리를 듣지 못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교육되었거나 훈련된 사상과 이념에 의한 기억들로 생각하고 말할 뿐이라는 것을 아인슈타인을 말했다. 즉 참된 것,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닫는 것들도 여전히 이미 입력된 사상과 이념에 따라 인식하고 인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보게 하니 바리새인들이 이상히 여길 때에,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 함이라고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악하다고 말했다. 또는 공자, 순자는 인간의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맹자도 성악설(性惡說)과 성선설(性善說)의 양면성을 주장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본성대로는 착할 수 있으나 또한 인간에게는 욕심이 있어서 악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본주의 바탕에서 각양각색의 이념교육을 당연시하는 것이 현대인의 문명인 듯이 말한다. 만일 인간의 근본이 악하다고 한다면, 성경적 모순에 빠지고 만다. 즉 창조자의 선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님을, 인간의 본성, 본질은 선하다고 말해야만이 기독교적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한 뜻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다시 이하늘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녀는 태중에서는 정상적인 존재였었다. 그녀는 태중에서 280일을 지내면서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 있었고, 간접적으로 느낌을 받았었다. 예를 들면, 임산모의 기분을 동일시 느낀다는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를 느낀다는 것이다. 하물며, 음식을 먹을 때에 대한 반응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저의 경험에 의하면 확신할 수가 있겠다. 태중에서 월남을 했을 때에 산중을 종일 넘어가는 산모의 느낌을 그대로 받았고, 개성에 어느 마을에서 밭에 있는 호박으로 찌개를 맛있게 먹었던 것이 출산 후에도 같은 느낌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언어적 의미까지 뜻은 몰라도 느낌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태아들은 태중에서 나올 때에 태중에 있었던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유사한 일에서는 익숙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세상에 나왔지만 전혀 현실변화에 별다르지 못함으로써, 태중에 있었던 것들이 그대로 의식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태중에 아기가 출산 중에 순간 의식을 잃는, 순간 사망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듯이 말이다.
그것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습득된 모든 것, 지식이나 인간관계 등이 천국에 가면 다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태중에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때에 태중의 일을 기억하지 못함 같이 말이다. 만일 세상의 일들이 기억난다면, 엄청난 비극이 될 수가 있겠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다면, 행복하겠는가? 세상의 문명을 기억한다면, 비교하지 않겠는가? 결국은 천국도 복잡한 세상이 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태중에 일들을 그대로 인식하면서 세상에 나왔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니 무엇을 인식하거나 의식하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를 통해서 그나마 자신의 존재감을 의식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식했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절대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내할 수가 있었고,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관계로 남편이, 그리고 아들이 주어짐으로써 남편과 아들, 특히 태중에 함께 했었던 아들에게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 인식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즉 그녀는 아들과 관계 속에서 인내와 온유함으로써 상호관계가 확인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하늘아, 이제는 나를 대신할 아들을 너에게 주었단다. 그 아이가 너를 기쁘게 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내와 온유함이 가정 안에서는 사랑으로,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우정으로 끈끈한 관계를 지속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상호의 존재를 확인해 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