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고통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우리의 친구나 가족 중에 누군가는 분명히 유방암으로 유방절제 했거나, 에이즈에 감염이 되었거나 치매에 걸렸다.
우리가 아무리 젊다고 해도 친구나 가족 중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되도록 고통의 상황을 외면하려고 하지만, 항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삶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연민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고통의 상처에서 얻은 지혜만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안식처를 찾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모든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고통이 없다면, 인간들의 교만이 극치에 닿을 것이다.
고통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 고통의 상처는 선한 영혼을 소생케 하며,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준다. 암흑의 항로에서 등대의 빛을 발견하듯 고통은 인생의 빛을 발견하게 한다. 고통 중에 삶의 안식을 발견하고 참 안식을 찾게 된다. 주변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질 때, 고통에 동참하며 진정한 안식처를 찾게 된다.
[단상]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사람이 고통 없는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기대하기에 사람마다 고통 없는 세상, 고통 없는 환경, 고통 없는 여건을 찾거나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과 수단을 시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으며, 거짓으로 포장할 뿐인 것이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도, 어떤 권력을 취해도, 인생에 고통의 담을 피하거나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지식을 많이 쌓아도 고통의 해석만 많이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시왕도 무병장수를 꿈꾸며 불로장생을 위한 불로초를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이처럼 인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명설이다. 이를 성경에서는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여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는 이마에 땀이 흘리도록 일해야 살 수 있음을 일깨우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솔직히 벌을 내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좀 더 생각을 한다면, 이는 벌이 아니라 아담이 선택한 길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불교에서 말하듯이 업보, 유교에서 말하듯이 운명 등으로도 해석을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은 반드시 죽어도 고통이 없다면 하고 생각을 해보다면, 이것은 기막힐 일이 아니겠는가? 첫째는 죽음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아니 아담을 저주할지 모른다. ‘왜 죽어야 해?’ 둘째는 깨달음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 않겠는가? 짐승처럼 말이다.
분명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는 삶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에서 고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인류는 끝없이 발전하고 성장해 온 것이다. 그것을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문명이라고 말이다. ‘문명’이란 유일하게도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유일하게 창조자의 형상을 닮게 지음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듯이 인간도 창작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여기서 ‘창조’와 ‘창작’의 차이를 주는 이유는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면, 창작은 유(有)에서 유를 응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이런 창작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있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고 나타내야 하는 것이 필연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과정을 통해 삶의 가치, 존재의 가치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고통인 것이다. 즉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기에 고통이라는 자극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사악함, 즉 교만함이 있어서....... 이는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은 이후에 인간의 내재된 속성, ‘이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 3:5)고 뱀이 말한 이념 때문인 것이다. 이미 아담의 마음속에는 뱀이 말하기 전에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인간에게는 대물림이 되어서, 불교에서는 업(業) 또는 업보(業報)라고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라고들 말한다. 쉽게 말하면, 뱀이 아담에게 말했듯이, 인간에게는 아담의 이런 속성을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삶의 고통을 잊으려고 수많은 정신세계를 이끌어내었고, 벗어나려고 서로 고통을 넘겨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기도 하는 인간세상이 되었다. 그러할지라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을 덜 느끼려면 짐승처럼 사는 길, 생각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에 빠져 사는 길뿐이다.
이러한 인생, 고통을 외면하거나 의식하지 않으려는 삶은 인생의 가치를 망각하게 되고, 상실한 결과를 맞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또한 인생철학의 끝은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았는가?
참된 인생, 진실한 삶에는 고통을 통해서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섭리’라고 함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며, 또는 인간의 타락한 세상을 이미 아셨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삶에 고통을 아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낼 것을 예비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도록 한 민족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게 하셨던 것이다.
좀 더 쉽게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으므로 유한인생(有限人生) - ‘반드시 죽는다.’라는 길로 갈 것을 아셨으며, 그 인생들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녀를 택하심을 세우신 것이다. 이를 간단하게 알게 하신 것이 예수님이 주신 기도문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태 6:9~13)
이는 인생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없는 인생을 살려고 할수록 악한 길로 갈 뿐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그는 부활함으로써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피하지 않았으며, 예수를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