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說知考]
- I realize and think for the Lord's words. -
『그때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그의 제자들이 다가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를 위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태 5장 1절~ 5절)
~~~~~~~~~~~~~~~~~~~~~~ 성경말씀 ~~~~~~~~~~~~~~~~~~~~~~~~
예수는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했다. 이는 선지자로 예언한 것을 이루려 하심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예수는 전파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세례요한의 뒤를 이어 활동을 하기 시작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갈릴리 해변을 두루 다니시며, 베드로와 시몬과 안드레를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고,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으며,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와 모든 악한 것을 고치셨다.
그래서 예수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지고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자와 귀신 들린 자와 간질 하는 자와 중풍병자들을 예수 앞으로 데려오니 예수는 모두 고쳐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예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으며,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까지 퍼져 무리들이 쫓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들, 불치의 질병과 귀신 들린 자들에게도 회복과 치유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하여서도 가르치셨던 것이었다. 무리들이 병 고침만을 받고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통하여서 마음에 평화를 얻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두워질 때까지도, 예수가 떠나기 전까지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따르며 가르침을 들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 예수의 행적들, 병 고치고 전파하고 가르치신 것을 그들이 들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때에 무리들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유대인의 역사와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오직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가 오심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말씀에 집착하는 것은 두 가지의 현상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하나는 종교학적 입장에서 경전에 대한 이해하려는 것일 게다. 또는 문학적 입장에서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것일 게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차원에서 전설적인 배경을 통해 훌륭한 인물에 대한 관심에 있는 것일 게다.
이미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려왔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예언대로 성취하셨음으로 구약의 선지자적 역할은 세례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서 끝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데도 여전히 구약의 말씀에 메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역으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의심이나 불신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약의 말씀은 예수에 대한 증거로써 제자들도 인용하였으며, 예수도 자신에 대해 인용하였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은 예수에 대한 구약적인 예언에 대한 것이 아니며, 예수의 행적들, 즉 병을 고치시고,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방법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 당시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오직 병을 고치심에만 있지 않았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해가 지도록 따랐으며, 예수가 어디 계신지를 수소문해 가며 찾아갔던 것이었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는 예수가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예수는 활동을 시작했으며,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온 지방에 퍼져서 몰려온 무리들에게 병도 고쳐주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것에서 평안을 주시고,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 첫 가르치신 것에 대하여 사도 마태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예수가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무리들도 그의 앞에 모두 앉았을 것이다. 예수는 무리들 사이를 다니시면서 질병을 고쳐주시고, 고통에 시달림도 회복시켜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위로해 주시며 그리고 하늘나라 이야기를 가르치셨기에 해가 어두워지는 때까지 무리들은 예수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여기서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뭐라고 해석하는가? 물질이 풍부하여도 마음이 가난하니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직접 들은 얘기를 하나 소개한다면, 기독교 교사 수련회에서 강사는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했다.
‘내게 밍크코트가 있어도 내 마음이 가난하니 복되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물질의 부유함에는 상관이 없고, 마음이 가난하다면 하고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마음이 가난한 것과 같다고 말이다. 참으로 교활한 생각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큰 교회일수록 목회자들의 월급이 대기업 수준이라는 소문이 있고, 그들의 생활이 호화로운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진실로 심령이 가난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것일까? 첫째로는 어린아이들이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고, 더 가지려는 마음도 없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소박하다고 하고, 천사 같다고 하며, 순진하다고 어른들은 말한다. 그렇다. 어린아이들은 있는 것으로만 만족한다. 아니 모든 걸 빼앗겨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사실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래서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들의 세상을 보고 싶다면, 아이들이 있는 놀이터에 가서 살펴보아라.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강하게 억압된 아이들만이 가끔 고집을 부리거나 욕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서로 자연스럽게 잘 어울려 지낸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차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원하지 않아도 상대 아이에 비유를 맞춰주거나 호응해 주면서 내색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는 마음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 가난한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가난이란 물질적이거나 마음에 생각하는 것들에 극한 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자아(自我)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육신을 이루어진 자아,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나 자유의지로 형성된 자아를 말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를 잘 말씀해 주신 것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을 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도 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겠다.”(창 8:21)
이 말씀은 ‘어려서부터 악하다’함에는 스스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아기가 태어난 후부터 세상적인 지식에 영향을 받아서, 가정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아이들은 교육되고, 영향을 받고 하여 세상의 악한 생각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세상적인 지식에 메이지 않고, 번민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심령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물들지 못한 심령들을 말한 것이다. 또는 이런 세상적인 것에 대한 갈등으로 애통해하는 심령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령들은 첫째로 진실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도 자연을 통해 알 수 없는 참된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가? 저 아이는 천성이 착해! 또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야! 이런 표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악한 자들도 분명하지는 않아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천사 같은, 법이 없어도 되는 그런 아이가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에 여자를 만드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에덴동산에 아담이 홀로 있는 것에 마음이 들지 않아서가 아닌 것이다. 여자가 지으심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에덴동산에 모든 생물에 대한 이름을 짓는 모습에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즉 선하지 못하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을 지으실 때에 지상에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정복하라 에서는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만 지으시고 나서 후에 깜박했네? 배필이 없구나? 그러했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기록함에 있어서 인간들로 깨닫게 하려 함에 있었던 것이다.
왜? 아담을 만드시고 나서 그가 깊이 잠들었을 때에,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은 유전자가 동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
이때부터 아담은 우선순위에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선악의 열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하지 않고 덧붙여 말하기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요렇게 말했다. 즉 만지지도 말라는 것을 첨부해서 말했다. 그 마음은 무엇이겠는가? 아담은 우월감, 여자에게 겁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러한 아담의 마음을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없는 여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심어놓으신 것이다. 그 ‘모성애’를 통해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선한 마음, 진실함이 자라게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가? 불량한 아이를 보면,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은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들에 풀들도 입히신다고 했다.
이제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는 것은 세상의 악함에 물들지 아니한 사람, 또는 세상의 악한 것에 대해 번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가 있겠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해답을 얻지 못하고 번민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하기를,
"너희는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 8:32)
옛 현자들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진리의 그림자만을 좇았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음에 이루었지만, 그들은 자유하지 못했다. 더욱 그들은 얽매이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비워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더 심한 번민에 빠지고 만다. 예수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태 12:43~45)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것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도우실 때에야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진실한 사람을 찾는다. 선한 사람을 찾는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찾는다. 그들로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