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수의 가르치심의 뜻-Ⅱ

[主說知考]

by trustwons


- I realize and think for the Lord's words. -

4. 예수의 가르치심의 뜻-Ⅱ



『그때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그의 제자들이 다가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를 위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태 5장 1절~ 5절)

~~~~~~~~~~~~~~~~~~~~~~ 성경말씀 ~~~~~~~~~~~~~~~~~~~~~~~~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고통받는 자에 위로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산 언덕 위에 앉으시니 무리들도 그 자리에 앉은지라.

예수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얼마나 이해할까?

다시 말씀하시길, 애통하는 자는 복되다 하시고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고, 온유한 자는 복되다 하시고 저희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흔히 듣는 말은 팔복이라고 하여 마치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을 하셨을까? 세미나에서 어떤 강연을 듣거나 할 때에,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형식으로 정의를 내리는 걸 볼 때에, 어찌 하나, 둘, 셋 …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할까? 진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정리하여도 되는 걸까? 사람들은 그런다. 삼세번이라고 말이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한때, 두 때, 세 때로 해석하는 것을 듣기도 했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이나 이론을 삼단계로 나타냄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식인 것 같다.

하물며, 뉴턴의 운동법칙에도 제일법칙-힘의 법칙, 제이법칙-가속도의 법칙, 제삼법칙-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정의를 내린다. 이러한 사고구조가 옳은 것처럼 인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도 그러할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인식은 본질을 왜곡하게 되고, 진실을 흐리게 이끌어갈 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심에는 그런 인간적 의식구조에 구속된 인식에 바탕을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듯하다. 예수께서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는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음은 애통하는 자를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아담에게 맡기셨으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를 범하여서 은혜의 동산, 에덴동산에서 떠나게 되었고, 그의 첫아들인 가인에게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악의 열매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시고, 아담에게 셋째의 아들을 주셨던 것이다. 이로써 아담은 깨닫고 그 아들의 이름을 셋(Seth)이라 불렀으니, 이는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아들을 주셨다고 고백하였다. 그 후에 아담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세상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사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을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 3:16)


이처럼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날 때에도 말씀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다윗에게도 그리고 선지자들에게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특히 애통하는 자를 더 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셨다. 특히 애통하는 자를 살피시고 위로를 베푸심은 오늘내일이 아닌 것이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으니, 그를 헤치지 못하도록 하시지 않았는가? 이처럼 하나님은 인류역사가 시작되는 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세상을 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단순히 억울한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일까? 여기서 ‘애통(哀痛)’은 삶의 본질에 있어서 애통함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즉 곤고한 인생이라든가, 공허한 인생이든가, 인생에 허무함에서 오는 괴로움, 또는 탕자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런 심정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곤고한 인생을 한탄하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를 바라는 데에서 오는 애통함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물론 인간관계로 인해 오는 괴로움, 고통 등에서도 근본을 찾으려는 데에서 오는 애통함도 포함되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일반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가? 너무 힘들면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인 셈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세상을 살피시며, 애통해하는 자를 찾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는 복되다 함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애통함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복되다 하심에는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인데, 이는 온유한 자에게 축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온유(溫柔)란 무엇일까? 여기서 온유함은 화평을 이루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편 37:11)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로다.”(시편 76: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리로다.”(시편 25: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 11:29)


그렇다. 하나님이 온유하시기 때문에 악한 자를 보시고도 멸하지 아니하시고 참으시며,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이 세상에 악함이 심하여도 오래 참으심도 하나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들도 인내함에 한계를 느껴도 끝까지 참을 수 있는 것은 온유한 마음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온유하지 않는 인간들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난폭하여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하고, 결국엔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이는 온유한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 그런 인물을 살피면, 가인이 그러했고, 사울 왕이 그러했다. 그들은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공의로 지도하시고, 그 도를 깨닫도록 가르치신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온유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이끌어주신 것이며, 사람의 도를 깨우쳐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만이 온유한 마음을 소유할 수가 있을까? 첫째로는 진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는 자신을 돌아보아 공의의 마음을 가지려는 자여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선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온유함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해하는 자와 온유한 자에 대해서 먼저 가르치심에는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험한 세상, 흑암이 가득한 세상에서, 특히 로마의 지배하에 척박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심령이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함이 적실함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심령이 가난함을 느끼지 못하고, 애통함도 없고, 온유함도 잃어버린 인간들의 모습이 어떠하겠는가? 그들은 진화론적 이념에 따라 적자생존(適者生存)과 약육강식(弱肉强食)에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하니, 어찌 참된 것을 보겠는가? 어찌 진리를 깨닫겠는가? 어찌 하나님을 찾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더욱 악하여서 가난한 마음도, 애통하는 마음도, 온유한 마음도 외면하고 거역하고 핍박을 하려고 할 뿐이다.

진리를 아는 자, 복음을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살면서 가난한 마음에 애통하는 마음을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바로 왕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 인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 나의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창 47:9)


이처럼 야곱의 인생이 나그네의 길이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온유함을 잃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깨달으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인생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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