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수의 가르치심의 뜻 - Ⅲ

[主說知考]

by trustwons


- I realize and think for the Lord's words. -

4. 예수의 가르치심의 뜻 - Ⅲ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장 1,2절 과 6,7,8,9절)

~~~~~~~~~~~~~~~~~~~~~~~~~~~ 성경말씀 ~~~~~~~~~~~~~~~~~~~~~~~~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소식을 듣고서 예수는 활동을 시작하셨다. 먼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시고는, 이때부터 예수는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시면서 제자들을 찾으시고,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불렀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들이 곧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 부분을 믿는 눈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아무나 제자로 삼으시지 않으셨음을 말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이 아무나 진리를 깨닫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통을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던 것이었다. 그러자 각 지방에서,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지방,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무리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무리들도 앉았으니, 이때에 제자들이 예수 앞으로 나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는 무리들을 향해 가르치시기 시작을 했다. 그토록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유대인들은 얼마나 피폐하였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애통하였겠는가? 이 무리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예수는 가르쳤다.

먼저,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과 애통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애통해하는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 복되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이 말씀을 얼마나 이해를 하는가? 아니 예수가 이 부분을 먼저 말씀하신 이유를 아는가?

그냥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였으면 좋겠다. 멋진 강연이나 유명한 강사에 매혹되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면 모두 좋게만 듣거나, 그리 말하는 것에 매혹되어서 무슨 소리하는지도 모르면서 극찬을 하는, 대환영을 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 소문난 사람, 연예인, 사회적으로 유명해진......... 그런 사람에게는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뭔 소린지 모르지만 모습만 보아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많이 듣고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종류와 비교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예수가 가버나움에 가서 살게 된 이유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제자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

무리들이 인기(人氣)가 있어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애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에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가? 이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애통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러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인간들일까?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이라고 함이 적합한 표현이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함에는 한 인격체를 의미하지만, ‘인간’이라고 말하면 인간관계 안에서의 존재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인간답다’라는 말을 쓰는데, 그 의미는 인간관계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답다’라는 말의 의미는 인격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후에, 아니 인간들의 세상에서 누구를 살피시겠는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애통해하는 사람, 그리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인 것이다.

여기서 좀 더 살펴보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뭘까? 가난한 사람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살펴보면 더 확실히 이해가 될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겸손하지 않는 편이다. 즉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는 자기주장을 강하게 나타낸다. 여럿이 모여 있을 때에 대화를 장악하고 강력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인간이다. 이 정도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생각된다.

다음은 애통해하는 사람과 애통해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뭘까? ‘애통하다’의 의미를 사전을 찾아보면, 몹시 슬퍼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표면적으로 인간관계로 인해 오는 불편함이나 불리함에 의해서 억울함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애통하다는 것에는 인간적 도리에서 그 사람에 대한 연정이나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 오는 애절함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창조주가 지으신 인간의 본연(本然), 하나님의 형상 등에 있어서 애통함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의 상실에 대해서 안타까운 심정을 말한다고 하겠다.

그 예를 들면, 측은지심, 불쌍히 여김, 가련함 등........ 옛날에는 그런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서 긍휼을 베푸는 모습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엔 긍휼보다는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는 모습들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러면서 더욱 웃기는 것은, 벌레나 동물에 대해서는 불쌍한 태도를 취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측은심이 많은 인간처럼 내비치고 있다. 얼마나 같잖은가? 이처럼 현대인, 문명인이라는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이 이처럼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즉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마음이 애통해하는 사람과 온유한 사람들에게서는 의(義) 로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이란 인간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로마 3:10,11)


세상이 말하는 의는 의(義)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명분(名分)인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깡패들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말하면서 목숨을 건다. 이런 현상이 정치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당을 위해 살고 당을 위해 죽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당을 형성하지 못하면 지도자의 수명이 짧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당파싸움질로 오백 년을 갔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뒤에는 중국(명, 청)이 있었기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에는 의인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인이란 하나님이 칭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 좋은 예를 보면, 창세기 6장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땅 위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짐승과 기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까지, 다 그렇게 하겠다. 이는 내가 그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만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창 6:7,8)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네 모든 가족은 방주로 들어가거라. 이 세대 가운데 네가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인 것을 내가 보았다.」(창 7:1)


이처럼 의롭다 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함에는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거지에게 동전 한두 푼 던져주는 행위 정도이겠는가? 진정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먼저 진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자비는 선한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하찮게 여겨서, 또는 우쭐되어서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그런 행위는 사악함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태 6:2,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아무리 사람을 속여도 하나님만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속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이 입에서 토해낼 때에만 인간의 생각을 안다. 그러므로 중요한 기도를 할 때에는 속마음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탄이 장난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함에는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생물과 다르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지으심은 받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만이 생각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관계를 통해서 인간사회를 이룰 수 있었고, 인간문명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는 인간에게는 교만과 욕심의 유전으로 선악의 갈등 속에서 어두운 인간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는 흑암의 앉아 있는 백성에게 큰 빛이 비치었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이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직한 사람을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은 이러한 사람을 찾으신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되는 것이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어린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아라! 어린아이들은 거짓말을 못한다. 아니 거짓말이 뭔지도 모른다. 거짓된 것들을 성인들에게서 배운 후에야 알게 된다. 어른들이 얼마나 교활한지 아는가? 아이들에게 ‘선한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야.’, 또는 ‘착한 행위를 많이 해야 착한 사람이 되는 거야.’ 얼마나 교활한 말인가? 선은 온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덜 선하거나 덜 착한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진실도 마찬가지이다. 덜 진실한 것은 없고, 대충 진실할 수도 없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되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서로 좋게 지내는 것?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 인간세상에서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여자를 유혹함으로써 하나님과 평화가 깨져버린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평화가 깨진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았는가? 영웅 니므롯(반역이란 의미임)은 온 족속을 한 곳으로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었다. 오늘날에 중공의 시진핑도 대외정책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중국의 하나라는 정책 속에는 한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이런 하나의 정신에는 니므롯의 사상이 숨겨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중국이 하나, 그다음은 아시아가 하나, 그다음은 대륙의 하나........ 그다음은 미국, 아메리카합중국의 고립인 것이다. 이미 남아메리카에는 상당히 중국화(china zone)가 깊어져가고 있다.

다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앞에서 말했지만, 온유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온유하지 않는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인내에 한계를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온유한 사람은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존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온유하시기에 사람이 온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인간 스스로 온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함부로 하는 이유는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소유이거나 지배하에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또는 국가의 지도자(왕)가 폭군이 되는 이유는 국민(백성)이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독재국가, 공산국가, 폭군의 나라에서는 인간은 하나의 가축일 뿐이거나 재산으로, 또는 유물론주의처럼 물질로 여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폭군이 되는 이유는 자신을 절대자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백성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겨서 공포정치를 통해 지배하려는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땅 위에는 어느 누구도 절대자가 될 수는 없다. 부모일지라도, 최고의 권력이라도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 중에, 조선 오백 년이란 세월은 비극인 것이다.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민본사상’, 백성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결국엔 평민과 양반으로 이원론적 국가관, 그래서 평민들, 주로 농민들, 이들을 비인격화 정책을 썼다. 그래서 그 민초들인 부모들은 자식을 새끼라 말한다. ‘내 새끼’, ‘내 자식’, 또는 귀엽다고 ‘ 내 똥강아지’ 등을 오늘날까지 입에 붙이고 산다. 그런데도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토록 전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개나 돼지나 소에는 개새끼, 돼지새끼, 소새끼 등으로 취급하는 것 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너무나 오 백 년간 무지(無知)하도록 길들여져서 말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새끼를 낳는 짐승에게만 새끼란 말을 쓴다. 알을 낳는 짐승에게는 새끼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하나님이 온유하시니, 하나님의 자녀도 온유한 사람이므로 평화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원하시며, 분쟁과 다툼은 악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 의에 주리고, 자비를 행하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기에 이러한 사람들만이 평화를 이루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복되다 함에는 이 땅 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복되다 함에는 일시적으로 이 땅에서 복됨에 극한 된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친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해 준 말씀인 바로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문에서도 있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은 기도문에 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에게 날마다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웬일로 주기도문보다는 사도신경을 더 많이 한다. 사도신경은 예수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훗날에 로마기독교(천주교)에서 유대인을 학대하기 위해서 만든 주문인 것이다. 유대인에게 이 사도신경을 말하고는 너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라고 한 후에 하지 않으면 쫓아내거나 죽였던 것이다. 물론 사도신경의 내용에는 틀리지 않는다만, 목적이 악한 것이었다.

다시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날마다 주기도문을 묵상하거나 소리 내어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도문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주신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기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오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오며,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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