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說知考]
- I realize and think for the Lord's words. -
- 더 의롭지 않으면 -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 가운데 한 점,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 계명 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울법학자 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장 17절부터 20절까지)
~~~~~~~~~~~~~~~~~~~~~~~~~~~ 성경말씀 ~~~~~~~~~~~~~~~~~~~~~~~~
유대인 사회에서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다. 조선시대에서도 양반계층에 있는 분들 중에 나라의 녹을 먹고사는 인간들은, 그중에서도 유생(儒生)들은, 또는 가난하고 벼슬이 없어도 유교적 학문이나 인격을 가춘 선비들은 손에 흙은 묻히지 않으며,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즉 맑고 공정하며 욕심이 없으며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 또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세수청백(世守淸白), 공명정대(公明正大) 등으로 스스로 높임을 받는 분들을 비유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인지 조선 오백 년의 전통과 풍습에 잘 길들여진 그 후선들이거나 전통성을 주장하며 그 후손임을 자랑하며, 여전히 차별의식을 내보이는 인간들이 아직도 기성세대에서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다고 그런 분들이 정말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갖추었느냐 하면 아무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정서는 아직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 유지되어 왔으니,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독특한 매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도 그런 고유한 문화를 나타내고 있어서, 처음은 어색하다가도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서양인들은 그래서 한국 사회는 매우 안전적인 사회를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옛 한글성경을 보면, 오늘날에 젊은이들이 매우 어색해하는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전통성이 담긴 언어적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가라사대’, 또는 ‘말씀하시오니’, ‘~느니라’, ‘~하리로다’, ‘~할지니’ 등등. 젊은이들에게는 헷갈리는 것들이다. 이러한 어투(語套)는 양반들에 의해 변형된 한글의 신분적 언어가 되어버렸다. 원래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원형적인 언어를 쉽고 편리한 글로 표현하기 위해 만든 글자가 초기 한글이었다. 즉 천민이 양반과 동급이 되지 못하게 언어적 차별로 변형시켜 놓은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유대사회에서도 신분계급이 있었느니,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 말하면서 천민 취급을 했었던 것이다. 거기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까지도 무식한 자로 여겼으나 지혜롭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놀라기도 했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도 예수의 제자들을 무식한 자들이라고 인식하며 오히려 바울(사울)을 더 높이 평가하는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설교를 많이 하는 편이며, 신학적 근거도 역시 바울신앙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사회와 조선사회를 비교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니하고는 절대로 인간사회는 인본사상 중에 하나인 진화론적 사회구성화가 이루게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뿌리는 인간의 교만함과 탐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즉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선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일부 인간들은 착각을 한다. 인간에게는 선악의 두 마음이 있다는 철학적 사고방식에 의해 선악론(善惡論)에 대해 성선설(性善說-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과 성악설(性惡說-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등을 내세워 이원론적 존재론을 이끌어내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덕을 세우게 하는 네 가지 마음,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과 죄를 지으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 그리고 사양하는 겸손한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과 옳고 그릇됨을 아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면서, 이러한 것을 인(仁), 예(禮), 의(義), 지(智)에 근본이라고 말하며 인간에게 교육(敎育)과 수양(修養)의 필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또는 성악설-‘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중국의 순자는 인간본성은 이기적인 욕망으로 보고, 선행은 후천적 습득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설로써, 인간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중세시대에는 절대적 진리, 신의 뜻, 이러한 신본주의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어서 신의 뜻에 맞게, 좇아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하였었다가, 근대 이후에 와서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에 근거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절대적 진리, 신의 존재를 상정(常情)한다면,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며,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의 존재를 강조하면서, 이성과 감정(본능)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의 기원설을 쓴 다윈사상에 의해 생존 경쟁하는 인간으로서, 진화론 사상을 내세웠으며, 한편 의식과 무의식으로 정신분석학적인 철학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이성의 존재와 욕망의 존재로 이원론적인 철학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의 근본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27)에서는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창조, 즉 성선설이 맞다고 한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죄를 짓고 출생한다는 관점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도 맞다고 한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는 언제부터였을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뱀과 대화를 나눈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가 있겠다. 뱀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이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줄 하나님이 아신다.”(창 3:4,5)
이후에 아담은 하나님과 대화에서,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두려움에 숨었다고 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느냐? 내가 먹지 말라고 네게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여기에서 아담의 태도가 두 마음을 엿볼 수가 있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라고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제게 줘서 먹었습니다.”(창 3:12)
여기에서 아담의 두 마음은, 첫째는 ‘당신이 준 여자’, 둘째는 ‘그 여자’의 표현이다. 정말 아담이 여자를 사랑했다면, 어찌 말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의 인간의 본능으로도 짐작이 간다.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은 것은 여자가 강요해서 먹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결정해서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 것인 셈이다. 에덴중앙에 있는 선악의 열매나무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은 누구의 강요 없이 그들이 자연스럽게 온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뱀은 여자에게만 말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뱀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먼저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 아담에게 주자 그도 먹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날에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담의 말대로 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악의 열매를 먹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여자로부터 죄악이 들어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해할까? 왜 예수님이 산상에서 말씀을 주실 때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태 5:17)의 말씀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렇게 거창하게 유대사회와 조선시대를 말하는 것은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교활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담을 보아라. 그는 선악의 열매를 먹기 전에 이미 교활한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니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에 심심해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냥?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첫 메시지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시작함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간악함은 첫째로는 ‘신이 없다.’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첫 말씀이 인간은 피조물임을 확실하게 해주시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지를 창조하다’라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였을까? 아담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에덴동산에서 모든 동물의 이름들을 정했을 때에 하나님은 감격했을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각 생물의 이름을 부른 것이 곧 그 생물의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였다고 볼 수가 있겠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아담은 그 각 생물의 이름을 부르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닌가?
어찌 보면, 천지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과 아담은 서로 뜻을 같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는 그로 하여금 천지에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로 하여금, 천지를 다스리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던 것에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 모양이란 것이 하나님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천사들도 그러하다. 천사들도 어떤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시공간에 존재하는 자로써 어떤 형상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천사들도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단순히 외형을 지닌 인간으로서 부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됨이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라고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러한 섭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남녀가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게 하심에는 비밀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유일하게도 관계적 존재를 가진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는 다른 것을 창조할 때와 다르게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 하시고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Then the LORD God formed a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ome a living being.)
즉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말씀만으로 하지 않으시고, 흙을 빚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산모의 모태에서 인간의 형상이 자라남에서도 놀라움을 보게 된다. 물론 다른 생물들에게도 신비로움이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더욱 신비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형을 만드신 후에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신비로움인 것이다. 즉 모태에서 인간의 형상이 만들어질 때에 그 아기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가?
인본주의자들은 진화론자들처럼 우연이 생명이 발생하듯이 모태에 아기도 우연이 생명을 가진다고 생각하기에 인조인간, 생각하는 로봇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상상의 가능성을 믿게 하려고 AI(인공지능)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는가? 복제인간을 연구하는 수의사들의 장난도 얼마나 잔인한가? 수많은 동물들을 실험대 위에서 장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그들은 제대로 모르고 있다. 진화론적 개념의식은 유사성과 우연성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유사성과 우연성의 의미는 매우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현대물리학(양자물리학)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근본은 불확실성론에 있는 것이다.
너무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지각을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지각(知覺)이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실 때에 코에 생기를 주었다는 데에서 힌트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즉 인간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주셨기에, 그로 천지에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사고능력과 판단능력이 있음을 철학에서는 이성이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천지를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처럼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인간들은 그것을 잃고,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표현해 준 과학자가 있는데,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교육받은 대로 기억된 지식에 의해 산출해 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노아에게 미래에 일을 말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집단사회를 형성해 가면서, 진화론의 사상에 깊어지면서, 맹자나 순자처럼 인간은 교육받을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집단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의 체제를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보면, 스파르타식 교육을 들 수가 있겠다. 즉 고대 도시국가인 스파르타가 쉽게 몰락한 이유는 인구감소였다. 스파르타는 보병과 기병만 먹여 살리는데 목적을 두었기에 집단의 보편적 구성을 무시하고 특정집단에 집중한 결과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구감소로 쇠망하고 말았다. 오늘날에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바로 북한집단이다. 즉 인간의 자연스러운 가치를, 평등과 자유와 존재의 가치를 말살했기 때문에 그들은 가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구는 늘어나지 못하고 인간문명도 역시 발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함은 인간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예수는 산상에서 많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놀라운 말씀을 더하셨다. 즉 그가 이 땅에 온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메시지)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고 했다. 여기서 율법은 모세로부터 온 제도적인 것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서, 그것을 완성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했다. 아니 다 이루게 된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약속하신 모든 것을 다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 전체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이다. 이처럼 거룩한 믿음은 온전하여서 그 믿음에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도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귀신을 쫓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다.”(마태 17:20)
믿음은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믿음, 완전한 믿음, 즉 거룩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산만 옮길 능력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늘나라를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런 믿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켜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은 자는 어떻겠는가? 성경의 이야기를 삼국지 소설처럼 해설하고 풀이하는 것은 진리를 가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에 즐거워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거짓양은 거짓목자를 따른다고 하지 않는가?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은 그들만의 열성을 가지고 있듯이,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서 ‘너희의 의(義)’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것을 잘 말해준 곳이 히브리서에서 알 수가 있겠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믿음은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것을 아는가? 믿음이란 적고 많은데 있지 않고, 온전한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과 염소의 나눔에서 염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온전한 믿음, 거룩한 믿음은 마음이 진실해야 만이 가능하다. 거짓된 마음에는 결코 신실한 믿음을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은 이러한 진실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래서 늘 강조하는 것은, 「자신에게 진실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짓은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자신과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은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