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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리는 구속받지 않는다

[단고]

by trustwons


* 단고(端攷) - 옳음에 깊이 상고하다.

1. 진리는 구속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는 어느 누구 한 사람에게나, 어느 교회나, 어느 교파에나, 국한(局限) 되어 세움을 받지 않는다. 또한 독점받지도 아니한다. 그러하다면, 진리의 모순이 된다. 또는 진리일 수도 없다. 참 진리는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아니한다.

(2009.10.27. 심야)


인간의 세상에는 지식들이 많다. 유일하게도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에 끝없는 생각들을 생산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태고에 인간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유인원(類人猿)을 생각하게 되고, 즉 사람을 닮은 원숭이, 또는 인간을 포함한 원숭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을 통틀어서 유인원(Ape)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뿌리에는 진화론적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진화론의 특징은 유사성(類似性)과 분류(分類)에 원칙을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연관성을 추적해 되는 사상인 것이라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러한 진화론적 사고는 인본주의에서 출발하게 되면서 수많은 지식들을 생산해 내놓았다. 그러한 지식들이 끝없이 진화하여 오늘날에 문명을 생산해 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문명의 지식들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형성하고, 의식의 진화로 말미암아 놀라운 지식들을 생산해 놓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이처럼 인간의 잠재적 능력인 의식화의 인지능력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인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지식들 중에서 수세대를 거쳐서도 인지(認知), 즉 여러 세대에 알게 되는 것(앎)을 그들은 진리라고 말하거나 불변의 지식이라고 칭하면서 전해온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인간의 인생에는 안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등등. 그리고 석가모니의 깨달음, ‘욕심보다 더한 불길은 없고, 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 고요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오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잘 대해줄 것을 바라지 말고, 지나간 일을 원망하지 마라.’ ‘혼자 있을 때는 자기 마음의 흐름을 살피고, 여럿이 있을 때는 자기 입의 말을 살피라.’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마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마라.’ 등등. 그리고 칸트의 명언 중에는,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이끌어 나가는 능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거짓말에 의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그의 존엄성을 말살하게 된다.’, ‘인내심을 가져라. 사람들의 비방은 오래가지 못한다. 진실은 시간의 자녀이기에 머지않아 그것이 당신을 변호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나는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다.’ 등등. 그리고 탈무드의 명언, ‘사람에게는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가 있는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결점이 없는 친구를 사귀려고 한다면 평생 친구를 가질 수가 없다.’, ‘자기 아이에게 육체적 노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약탈과 강도를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욕하거나 책망하지 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이다.’, ‘배우는 것을 복습하는 것은 외우기 위함이 아니다. 몇 번이고 복습하면 새로운 발견이 있기 때문이다.’ 등등. 그리고 또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가난해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부유해져도 행복하지 못한다.’, ‘깊이 사랑을 받는 것에는 우리에게 큰 힘을 주고, 깊이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준다.’, ‘바라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좌절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 이름을 가리킴이지 실체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진실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에는 진실이 없다.’, 또는 닐스 보어는,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실재라고 여길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많은 현자라 칭하는 사람들의 말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후자에게 전해져 온 것들에 인간들은 명언으로 삼고 마음에 두기는 하지만, 실은 깨달음이 적은 편이다. 만일 깨달았다면, 더욱 현명한 길로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러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내뱉어 자신을 내세우려는 데에 더 관심이 많다. 혹 조금이나마 깨달았다면, 그의 인생은 풍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지식들에서는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아는가? 그 모든 지식에는 진실(참)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결국엔 거짓이 끼어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변의 지식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지식을, 지혜를 얻기에는 너무나 무지한 존재들에게서 나온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첫째로 인생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생명들이 태어나고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특히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말이다. 그리고 천지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아는가? 또는 천지만물이 왜 있게 되었는지도 아는가?

예수는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말했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태 23:26),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한 9:39)

그래서 잠시 ‘어둠의 사십 년’의 소설을 통해서도 진리를 알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알겠는가? 마치 인간은 지혜롭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지혜가 얼마나 하겠는가? 잠언에서는,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언 26:12), 전도서에서는,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전도서 1:17), “그 사람이 지혜자 일지, 우매자 일지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2:19),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전도서 2:21),

이처럼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더하고 덕을 더할지라도 그것이 지혜를 알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즉 지혜는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고 어느 현인이 말한 것이 생각이 난다. 그렇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인물 중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에 의롭다 함으로 지혜를 얻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의 믿음에서 지혜를 얻었으며,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역경에서도, 통치자로서도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혜는 하늘로서 온다고 말할 수가 있고, 또는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 14:26) 즉 지혜는 성령에 의해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은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즉 맹인 된 자들에게는 말이다. 아무리 설명하여도 마음이 닫힌 자들에게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여는 자들에게는 그 지혜가 열려 진리를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열겠는가? 진실한 마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거짓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진실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진실된 마음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혜는 하늘에서 얻는다고 한 말도 마음이 진실한 자에게만 하늘로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활보를 하며, 스스로 의로운 척하면서 세상을 움직이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 자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이런 자들로 인해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끝없이 요동치며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이런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쳤던 것이다. 왜 인생이 고달픈지 아는가? 이런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진리가 여기에도 있다, 저기에도 있다 하면서 인간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서로 증오하게 하고,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분쟁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 말하며,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듯이 어둠의 길로 잡아 끌어당기는 것이다. 인간이 조금만 진실한 마음을 품는다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하는 눈을 가지게 되고, 말하는 인간을 추종하기보다는 그 말의 의미(속셈)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말하는 그 인간에게 맹종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추종자들이 있고, 개딸(어떤 자의 여성 지지자들이 스스로 개혁의 딸을 줄여서 쓰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진리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고 믿거나, 이것도 진리, 저것도 진리라고 믿는 자들인 것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가장 보편성을 가지며, 편견이 없으며, 어떤 구속도 받지 아니하며, 어떤 제한도 없으며, 진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치성을 가지며, 모든 것을 품으며, 모든 것을 이르게 하며, 모든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오직 유일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얼마나 깨닫겠는가? 결코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만일 진리가 여기저기 있다고 하는 자들, 이단자들, 거짓 선생들, 그들은 자신이 제2의 예수라 하거나, 그들은 자신이 육신으로 온 하나님이라 하거나 하면서 눈먼 자들에게서 재물을 빼앗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더욱 신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런 현상을 아시고 조심하라고 가르쳤으며, 깨어 기도하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즉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인 셈이다.

끝으로 이 말씀을 소개하며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 17:17)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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