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세종대왕(1397년~1450년)은 한글, 훈민정음을 창제에 목적과 뜻을 가졌으며, 천민, 백성들의 언어를 글자로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여 왕실과 백성 간에 거리를 가깝게 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한자풀이를 한다면, 이렇다. 백성들의 소리(말)를 바르게 글자로 나타낼 수 있도록 가르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다.
사실 그 당시에는 양반들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한자의 글자를 사용해 왔으나, 천민들에게는 글자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지식의 공유를 차단해 왔었다. 특히 이씨조선 시대에는 신분사회와 같았다. 그래서 양반과 천민으로 조선사회가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사회, 제도화하게 된 것에는 지배층(양반)과 피지배층(천민)으로 나눈 데에는 정도전의 민초사상과 유교적 이념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당시, 정도전이 이성계를 세워 고려왕국을 무너뜨리고 새 왕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고려의 왕족과 귀족들을 대거 숙청해 가는 과정에서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절 안에 숨겨있는 귀족들의 재산까지 몰수하는 과정에서 불교탄압을 하게 되었으며, 이에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이씨조선을 세워갔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신분과 예절에 의미를 두어, 주로 양반사회에만 적용되는, 천민들에게는 해당이 제외된, 조선사회를 형성해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양반과 천민의 이원론적 사회구조로 오백 년의 통치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의 명, 청나라의 보호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오 백 년간에 해외에 대해 차단된, 아니 관심이 없는, 내국정치에 극한 된 조선왕국인 것이다. 그래서 양반사회에 흔히 쓰는 말 중에, ‘우물 안에 개구리’이 비양(飛揚)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즉 그 당시 이씨조선은 정말 우물 안에 개구리와 같은 왕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양반중심의 정치해 온 이씨조선에서 세종대왕은 왕이 되기 전에 백성들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천민의 심정을 잘 이해를 했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과 직접 잘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글을 제창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훈민정음’, 한글 창제에 크게 반대하는 양반들이 많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만리(崔萬理), 집현전에 부제학이었던 그는 언문제작, 즉 한글창제를 반대를 하였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상고했는지, 그 자료를 보면 가관(可觀)이다.
“소신 엎드려 살펴보건대, 언문을 제작하심이 지극히 신묘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용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지만, 소신이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이 되는 것이 있어서 감히 간곡히 정성을 살펴 삼가 열거하오니 성상(聖上)께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세종대왕을 높였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언문제작을 반대할 이유를 조목조목 상고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가관이다.
1. 우리 조선(이씨조선)은 조종(朝宗) 때부터 내려온, 지극히 정성으로 대국(명, 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글자를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마당에 언문을 창작하신다니 놀랍습니다.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비록 옛 전문(篆文) - 진나라가 만든 문자 -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音)을 쓰고 글자(文字)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가 되니 실로 의거(어떤 사실이나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2. 만약에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고 살았던 세대라면, 우선 언문(다른 나라의 문자)을 빌려서 한때 사용해 보탤 수는 있겠지만, 고집하여 말씀드리면, 언문을 제작하여 시행하여 임시방편으로 하는 것보다는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오랫동안 익혀온 것보다 못하다고, 그리고 예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비루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십니까?
이처럼 그 당시에 양반(兩班) 측에 신하들은 세종대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중국의 눈치만을 생각해서 반대를 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완성을 하고 백성들에게 발표했으나, 양반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았으며, 천한 글자라고 업신여겼다. 그러다가 훗날에 천민을 다스리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자 한글을 사용하기 하지만, 천민과 대화를 구별하도록 한글언어에 높임과 낮춤의 의미를 부여해서 존댓말과 낮춤말로 사용케 했다. 그렇게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의미를 신분차이의 언어로 둔갑시켜 버렸던 것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이유는 이렇다. 일제하에서 양반제도를 폐지하고 백성들의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민들에게도 성(姓)씨를 갖게 함으로써 다양한 성씨가 생겨났고, 저마다 양반집안인 것처럼 보이려고 열열이 유교를 고집하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다 보니 더욱 지나치게 조상숭배와 양반체통과 족보를 강조하는 풍토가 조선이 망한 지 백 년이 가깝도록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겠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편찬한 훈민정음에는 신분을 표현하는 높임글자와 천한글자로 구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들이 쓰고 있는 언어를 쉽게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놀라운 원리로 한글을 편찬했던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글의 표현력은 대단하다. 어떤 언어일지라도 다 표현해 낼 수 있는 글자라는 것이다. 영어든, 희랍어든, 유럽의 어떤 언어든, 그 소리대로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한글은 소리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나 동물들의 소리까지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의 언어 중에 유일하게도 한글만이 모든 소리를 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이 우리 조상이 사용해 온 언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조선 때부터 같은 언어를 사용했으며, 글자로는 고조선시대나 삼국시대나 시대마다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추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중국어는 한자의 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자의 뿌리는 단군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시대를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자의 원문을 그대로 사용한 나라는 조선의 백성인 것이다. 중국어는 그 한자의 글자를 약자로 변형된 것들이다. 즉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한자를 중국인들은 쓰기가 복잡하니, 간단하게 약자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순수 한자는 우리 조선이 사용되어 온 한자가 유일하다는 것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겠다.
<추가글>
우리의 한국인의 언어, 한글이 아닌 말, 은 아주 오래된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바벨탑 때에 언어혼잡 되기 전부터 있었던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온 땅에 언어가 하나였던 때에 니므롯에 의한 한 제국시대에 인간중심의 세상을 꿈꾸던 그가 바벨탑을 쌓을 때에 인간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기 전에 그 집단에서 탈출한 사람, 에벨(Eber)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벨렉과 욕단이었다. 벨렉은 그곳에 머물렀고, 욕단을 동쪽을 이동하였으며, 그 욕단의 후손들이 계속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동쪽 끝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욕단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즉 언어가 나뉘기 전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에벨의 뜻은 '건너온 자, 넘어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죄악 된 세상에서 믿음의 길로 건너온 자라는 해석을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고조선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침 해가 돋는 동쪽을 의미한다. 즉 땅끝을 의미한다고도 생각할 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