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Ⅲ]
우리 안의 상처를 느끼는 감수성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진정으로 아픔을 느낄 때 우리 안의 감수성과 다른 사람 안의 감수성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는 진정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남을 섬길 수 있다.
현대의 문화는 병든 사람들과 노인과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현대는 독립과 능력을 추구한다. 개척자 정신이 가장 높은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인간의 역함과 고통에 대해 관대하기가 어렵다. 인간이 끊임없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감수성을 부인하면 진정한 연민의 마음을 지닐 수 없다.
<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다른 사람을 섬기려면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저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동정이 아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마음을 가지려면 철저히 깨어있는 연민의 의식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신분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옴은 저자세가 아니라 진정한 연민의 마음에서 이었다.
그것은 어머니 품에 있는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같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감수성에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연민의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할 때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또한 상처를 어루만지게 되는 것이다. 섬긴다면서 상처를 안겨준다면 그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회고(回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 3:16)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요한복음 3장 16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이 말씀을 알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했을 당시에, 그는 자신이 예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아니 그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반복해서 물었던,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를 요한을 보았고 깨달았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했을 때에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에서 그도 고백적인 기록을 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에, 첫 글에서 요한은 이렇게 시작을 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디베랴의 호숫가에서 시본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로 가겠다고 하니 그와 함께 있던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가겠다고 했다. 여기서 요한은 또 다른 제자 둘이라고 하며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였다. 그 둘 중에 한 사람이 요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던 것이다. 날이 새어갈 때에 그들은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에 예수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고, 그러면 잡으리라고 했다.
그들은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잡았다. 그때에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했다. ‘주님이시다’라고 말이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벗어놓은 겉옷을 입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께 왔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님이라고 말한 사람을 밝히지 않고, 그저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라고만 말했다. 그 제자가 누구이겠는가? 바로 자신, 요한의 이름을 감춘 것이 아닌가?
그들이 물고기를 잡은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는 숯불을 피우고 그 위에 생선을 놓았으며, 그 옆에는 떡도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갑자기 생선과 떡이 있었을까? 그러면서 예수는 제일 먼저 온 베드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더욱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그물에 가득 찬 물고기가, 그것도 큰 물고기가 백 쉰세 마리(153마리)라고 했다. 그리고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왜 이렇게 세밀하게 요한은 기록을 했을까?
그렇게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뜻밖에 질문을 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다. 그것도 단순히 이름만 부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진지하게 물었던 것이다. 즉 베드로라 하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이다. 그런데 요한은 ‘베드로’로 기록을 했다.
여기서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로서, 예수가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고, 베드로에게 질문을 한 것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니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의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베드로에게 있을 일을 예수님이 말해주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 21:18)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그 제자를 쳐다보고는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남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예수님은 대답을 하셨다. 그런데 요한은 그 사람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 ‘이 사람’ 이렇게만 기록을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에 대해 설명까지는 말했다.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였던 사람이라고, 그리고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결국은 요한 자신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사도 요한은 유일하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요한 3:16)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기록하였을 때에, 그는 확실히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이다.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의 깊은 뜻을 말이다. 단순히 불쌍해서가 아니다. 동정심으로도 아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는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셨다. 그것도 홀로가 아니라 ‘우리가’ 하시면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자고 하셨다. 그것도 말씀만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손수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진정하심이었다. 즉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셨던 것이다. 일개 인간들이 놀잇감(장난감)으로 인형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도 여러 명씩이나 만든 것도 아니었다. 오직 유일하게 한 인간, 아담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연민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러하셨기에, 인간에게 인격을, 존귀함을,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얼마든지 인간의 마음을, 자유의지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그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런 분이시다.
그러하니, 여호와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과 여자를 두었을 때에도 자주 만나시고,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선악의 열매를 먹은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찾으셨다. 그것도 그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시고, 조심히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어디 있는지 아시면서도 그들을 부르시며 조심히 다가오셨던 것이다. 그들이 부끄러워 나무 사이에 숨었고, 자신이 벗은 것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왜 두려워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벗은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면 죽을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아니하시고, 또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그들의 진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교활하게 여자(아내)에 핑계를 댔으며, 여자는 그 이유를 뱀의 유혹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꼭 짚고 갈말이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성서연구가들은,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에게 심판(벌)을 내리신 걸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신지 의문이, 온유하신 분이신지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셨을까? 인간을 만드셨을까? 그러한 분이시라면, 그는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게 된다. 그는 사랑이시다는 것에 모순이 된다. 이 정도만 말하겠다. 이 뜻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자녀이어야만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아신다. 예수가 탕자의 비유를 말하심에서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겠다.
이것을 아는가? 세상의 왕들은,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수많은 인간을 공포에 몰아가고, 죽이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신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들, 그들은 연약한 인간을 빌미로 온갖 권력행세를 하고, 즉 공포감을 주어 강제로, 억지로 굴복시키려고 한다. 그것이 인간들이 선악과를 먹고자 한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신, 온유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지만, 강압적으로나 폭력으로나 무력으로 인간의 의지를 조정하거나 굽히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깊은 뜻은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분이심같이, 인간에게도 스스로 자신의 결정을 하도록 기다리신다. 즉 인간의 인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악을 행하여진 과정인 것이기에 그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사후의 심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근본이시기에,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시고 계신 것이다. 그 뜻을 살펴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태 6: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 6:26)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태 6: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 들아!” (마태 6:30)
하물며 선한 자만 아니라 악한 자도, 의로운 자만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햇빛을 내리시고 비를 내리신다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며, 차별하지 않으시며, 미워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고루 은혜를 베푸신다. 하지만 탕자처럼 아버지를 아는 자는 그 은혜를 알고 돌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정한 연민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연민을 깨닫는 자만이 진정한 연민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불쌍해서 구제한다고? 잘나서 용서한다고? 힘이 있어 용서한다고? 부유해서 좀 나눠준다고? 높은 위치에 있어서 인심을 베푼다고? 이러한 마음들이 바로 선악의 열매를 먹고자 하는 심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고통이 있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결과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그 고통을 느끼게 하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러한 고통이 있기에 인간의 연민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인간의 연민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자는 자식을 낳으므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의 연민을 알게 된다. 아니 하나님은 여자에게 사랑의 연민을 주셨기에 오늘날에 인류가 존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고,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만 가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남자들은 지배하려는 욕망과 폭력을 항상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러나 여자에게는 온유함과 인내가 있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한 후에 바로 여자를 창조하시지 아니하시고, 조금 간격을 두고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아담에게는 만물을 다스리도록 말씀하셨지만, 여자에게는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이제 정리하면, 인간에게만 연민의 마음이 있다. 진정한 연민은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바라보는 마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마음일 때에 진정한 연민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산상에서 가르칠 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 5:13,1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태 5:44,45)
그리하시고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쳐주셨다. 날마다 삶 속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 기도문이 바로 이렇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주시옵소서. 아멘.”(마태 6: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