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Ⅲ]
“시작할 때 이미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손해를 보아 고통을 당하거나 상처를 내고 부당하게 다룰지라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 고통을 받는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스스로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 지상의 어떤 거주자라도 주님 안에서 깨어 있고, 분별력 있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영원한 불멸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깨어 있고, 분별력을 갖도록 하자. 그리고 모든 씁쓸한 일을 고귀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어 내자. 우리의 주님이시고 영예와 권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 안젤름 그륀 지음>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다. 건강도, 재물도, 명예도, 신앙도 독존할 수 없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런 것들이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 하지만 성취 후에는 허탈과 공허가 소유한 것들을 삼켜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만들었다. 홀로 있는 아담에게 여자를 주심도 그렇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들은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문제들은 자신 안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도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외부에서 오는 수많은 고통들을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은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외적 고통보다 내적 고통이 더 많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내외적인 모든 고통들을 내적인 자기 신앙 안에서 해결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구원은 내적문제가 해결될 때에 이루어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요한 8:32)는 복음도 바로 내적 해방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침략적 성격이 아니라, 온유함인 것이다.
<회고(回顧)>
인간세상에서는 얼마나 고통이 크고 많으면, 인생무상(人生無常) -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허무하다’는 사자성어가 있겠는가? 물론 여기서 무상(無常)은 불교적인 용어로써, 사람이 나고 죽음과 흥하고 망하는 일에는 덧없다는 뜻으로써 석가는 민생 속에 살면서 깨달음 것이다. 또한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역시 전도서의 첫 글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그리고 ‘해 아래에서는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3) 등등으로 시작된다.
어찌해서 이러한 인생사에 고통이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만물의 연장이라고 하는 인간, 유일하게도 사고(思考)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인간에게서 나타난 철학(哲學)이라는 산물의 끝은 무엇이겠는가?
AI에 의하면, 기술문명에 의해, 여기서 ‘과학’이란 용어는 빼고 정리하면, 그 이유는 사실 인간문명은 과학의 힘이 아니라 기술의 힘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니 기술문명에 민감하고 더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기술 중심사회에서는 ‘사유의 과제’가 부각(浮刻)되는 점, 즉 철학적 질문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이유로 철학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철학의 끝’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사상과 이념)에 대한 신뢰보다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나 의미화가 더욱 빠르게 진화하기 때문이다.
AI에서는 현대철학 후기를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즉 2차 대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은 전통철학, 절대적 진리와 주체와 객체의 분리론을 비판하며,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 진리에 대한 역사성과 상호성, 그리고 창조적인 주체로서의 인간과 현대문명의 빠른 변화와 황폐화 현상 등으로 인해 인간의 성찰이나. 존재와 가치 등이 흔들리면서 인식론의 혼란과 인간관에 대한 부재현상 등이 절대적 진리나 사상적 이념들을 쉽게 말하면 쓰레기로 여기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문명이 인간세계를 지배하고 급진하게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인류에 일어날 것을 이미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 12:4)
바로 오늘의 현재를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단순히 여행하는 차원에서의 왕래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의식주와 문화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고하는 의식, 정상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냉이 뻥튀기 하듯이 산발적으로 무분별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화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로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즉 현대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이 폭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방 안에서 이것저것 마구 끄집어내며, 이리저리 마구 패대기치며,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인류는, 인간세상은 정신없이 시대를 초월하면서, 어떤 원칙도 없고, 어떤 가능불가능조차 분별도 없고, 현상과 가상의 혼돈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그걸 느끼지 않는가? 손안에 기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멀고 가까운 관계를 순간순간 넘나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순간시대에서 뒤떨어질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살아갈지라도 말이다. 인간에게는 결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누구도 믿지 말라. 모든 해답은 너 자신 안에서 찾아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니, 덧없음을 직시하라.”
예수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태 6: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자기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마태 6:25)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태 6: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하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태 6:28)
오랜 세월을 흘러 보내고서야 그 나무의 모습의 자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그것도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옛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이 철이 들 날이 있음을 말이다. 일찍이 철이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또한 물리적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인생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이 우연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미련한 인생을 누구보다도 귀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말이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에는 서로 상반된 것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석가는 인생의 고통에 미련을 두지 말고, 성찰함으로써 인생의 고통의 가치를 깨달아라,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인생에 고통은 지나갈 뿐이라고, 아니 인생의 고통에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 백합화를 보아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그리고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신다는 것에서 말이다.
사실 인생에서 오는 고통은 어떠한 고통도 쉽게나 또는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것임도 깨닫게 된다. 그 이유는 인생의 고통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함이며, 또한 그 인생의 고통은 누구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산과 들로 쏘다녔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에 세세히 못 느꼈던 것들이 나이가 들어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고 깊음을 음미하고 있음에서 놀랄 때가 자주 일어난다.
그중에 한 예를 든다면, 언덕 위에 누워 들풀을 눈앞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얼마나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었다. 그 후로 들풀에 관심이 생겼고, 들풀들도 서로 다름과 그리고 공통점을 알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들풀에 대한 친근함이 마음에 가득해짐을 느꼈고, 그리고 들풀 하나하나를 스케치했었던 것이 추억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시애틀에서 한 마당에 햇살을 받으며 들풀을 바라보았을 때에,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풀들이 햇살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며, 풀잎에 이슬이 송송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풀 사이로 아주 작은 벌레가 유유히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에 옛 시절이 생각이 났다.
한편, 이러한 들풀에게도 고통이 없을까? 아니 풀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풀뿌리에서부터 얼마나 진통을 겪는다고 하지 않던가? 마치 산모가 아기를 가질 때처럼 말이다. 그래 모든 생명들도 그러할 거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유난히도 인간만은 고통을 타인에게 돌리고, 또는 하늘에 돌리고 원망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 보니 더 큰 고통을 남에게 넘겨주려고 안간힘을, 발악을 하지 않는가? 그러한 한 노인의 고통을 보고는 어린 석가는 생각이 깊어졌고, 결국 궁전을 떠나지 않았는가? 그런 그는 민생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나 상처보다 자신 안에서 더 큰 고통을, 상처를 인식하고 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그렇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은 결국 내적인식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러한 인간들은 속되다, 고상하지 못하고 천박하다는 인간들인 것이다.
사실 타인이 주는 고통을 어찌하겠는가? 그러한 것을 마음에 품을 때에 내적 고통이 시작되고, 그것이 다시 원망과 분노와 증오를 낳게 되어서 고통을 지속되게 한다는 사실을 속된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석가는 그것을 깨우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깨닫지 못한다고 하며, 소를 비유하지 않았던가? 절에 가보면, 벽화에 그려진 소와 인간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겠다. 어리석은 인간을 소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도 이렇게 가르쳤다.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어라.”(마태 5:39)
“누가 너를 고소하고 속옷을 가져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어라.”(마태 5:40)
“네게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마라.”(마태 5:4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4,45)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인가? 이것이 인간의 인생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남은 천국을 향해 가기 위함인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인생에 고통이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하늘의 인생소설인, 「어둠의 사십 년」에서 말하지 않던가? 날 때부터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하지 못한 한 여인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어머니, 제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했는지를 깨달았어요. 물론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지만, 만일 제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인생에 고통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Seth)이 아들을 낳고는 그 아이 이름을 에노스(Enosh)라 불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이 연약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이 있음으로 인해 하늘 아버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비밀을 하나 더 알려드리면,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어떤 인간은 고통에 대한 원망함으로 더 악한 길로 가고, 어떤 인간은 고통에 대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타인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큰 고통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고통을 자신을 통해서 받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으며, 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친히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의 고통을 하나님은 잘 아실뿐만 아니라 그 고통에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