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내버려 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 하리라.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Be silent now and leave me alone. Let me speak-and I will face the consequences. Yes, I will take my life in my hands and say what I really think. God might kill me, but I cannot wait. I am going to argue my case with him. But this is what will save me: that I am not godless. If I were. I would be thrown from his presence.]
--------------- Bible ------------------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은 재물과 자녀의 축복을 받았다. 어느 날, 욥은 모든 것을 잃고 몸에 질병까지 얻게 된다. 아내도 친구도 외면하며 저주까지 한다. 여기서 욥은 절망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고백한다. 이것이 욥을 구원한다고 했다.
왜? 그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했다면 버림을 받았을 것이라 했다. 확실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욥처럼 말이다.
[知視考]-깨달음을 돌아보아 생각하다.
‘내가 당하리라.’의 욥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욥기서의 서두에 보여준 하나님의 신뢰하심, “내 종 욥을 유심히 살펴보았느냐?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없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한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욥을 어떤 사람이라고 했는가?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악을 멀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무슨 말인가? 욥에게는 원죄가 없는 것일까?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고 말이다. 그런데 욥에게는 그런 원죄가 없다는 것일까? 그래서 전도할 때마다 누구나 다 죄가 있다고 말이다. 너무나 핵갈이는 말이 아닌가? 여기서 인간에게 혼란이 온다. 무슨 혼란?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은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하시며, 친히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첫 사람이 바로 아담이 아닌가? 그에게는 원죄가 없지 않았는가? 그런 그에게 여자를 두게 하셨다. 그것도 아담의 갈비뼈를 택하여 흙을 입히어 여자를 만들었다. 여기서 아담과 여자는 원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지내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었으며, 완전한 행복이 있는 낙원, 즉 축복된 곳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곳이 아니었겠는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울렁이는 그런 파라다이스가 아니겠는가? 이사야서 11장에서 말하는 놀라운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그의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곧 지혜와 통찰의 영, 모략과 용기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1,2).........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는데,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고 다닐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젖먹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어린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치거나 다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고 있듯이 세상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6,7,8,9)」
이러한 상상을 에덴동산에서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욥은 모든 것이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그가 하나님의 신뢰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사람이라고 했듯이, 이스라엘 나라에 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는 흠도 없고 정직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가 누구이겠는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아니겠는가? 그런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으며,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쳤을 때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 그도 유월절 전날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눈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파묻고 엎드려 기도하였다. 그때에 그는 “내 아버지,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둬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간곡히 기도하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도 흠이 없고 정직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분이시다. 히브리서 9장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말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더욱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첫 언약 아래서 저지른 죄들을 대속하려고 죽으심으로써, 영원한 유업을 얻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약속을 받게 하셨습니다.”(14,15)
물론 욥과 예수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 또는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님이 신뢰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가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 그는 매우 근심에 잠겨 괴로워하셨다고 했으며, 또는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으며, 그는 고뇌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을 때에 땀이 핏방울같이 돼 땅 위에 떨어졌다고 했다.
여기서 욥이 당한 고난이나 예수가 받은 고난이, 그저 특별한 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욥도 예수님도 인간의 모든 조건을 가진 분들이다. 그분들은 완전한 사람이라 핑계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는 이런 말도 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을 때,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을 했다. “네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마가 10:18)라고 말이다.
그렇다.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로써는 선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말이다. 즉 인간은 아담 때부터 선악의 갈등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선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짐을 말함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인간들 중에는 자칭 선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역사 속에서도 스스로 존엄한 자라고 말하거나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겠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 자들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창조자 여호와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악을 멀리할 것이며, 거짓되게 살지 않을 것이며, 정직하게 살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 또는 잃지 않은 사람을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이 신뢰하는 사람은 고난이 왔을 때에 욥처럼, 예수님처럼 ‘내가 당하리라’, ‘뜻대로 하소서.’라고 고백하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은 고난을 당하면, 먼저 원망하고, 분노하며, 그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세상은 악한 자들로 인해 서로 고통을 받고, 서로 원망하고, 서로 분노하면서 고통을 가증케 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다시 정리한다면, 하나님이 신뢰하는 사람, 욥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예수는 알곡이라고 비유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추수할 일이 많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그러므로 추수할 주인에게 추수할 들판으로 일꾼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라.”(마태 9:37,38)
그리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는 권능과 모든 질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신 후에 그들을 마을로 보내어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신뢰하는 자, 욥과 같은 사람들은,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마을에 보낸 것처럼, 이미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자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죽음 앞에선 갈등을 가지셨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던 것이다. 욥도 역시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죽일지라도 그는 다른 소망이 없다고 했으며, 무슨 일이 당하든지 “내가 당하리라”라고 고백을 했다.
이러한 믿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산보 가듯이 그리 믿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짓인 것이다.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 또는 ‘내가 당하리라’고 고백하는 욥처럼, 피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던 예수님처럼 날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점검하면서 확인하면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하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러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이 되시오.”(베드로전 1: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베드로전 1:16)
이 말씀을 얼마나 이해할까? ‘거룩하다’이 무엇인지 알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함을 고상한 인격이나 품격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흠이 없는 온전함’을 말한다. 즉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약속한 것이나 뜻을 하나도 어김이 없으시며, 다 이루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이와 같이 흠 없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는 뜻으로 거룩하라고 하는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온전히, 전적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보여준 것이 욥의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