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세상? 인간들의 세상은 왜 일이 힘든 걸까?
아직 사춘기조차 모르고 지나간 그 시절에 부닥친 현실은 매우 곤고했었다. 내 나이 열다섯 살의 전후시절에 닥쳐온 가난, 중 2학년 2학기 때부터 하루하루가 배고픔을 넘어 쳐진 몸과 마음에는 오직 눈앞 일만 보일 뿐이었다. 중1학년이 되는 날부터 새벽을 깨우며 우남공원(용두산)으로 달려가 새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꿈을 내려놓아야 했던 것이 늘 배고픔이었다. 그런 배고픔도 삼일이 지나면, 하루 한 끼로만 버티는 것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시절에 알게 된 것은 인생에 대한 의문이었다. 결국은 인간관계조차도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음지가 그렇게 안정되고 편안하게 느껴지게 될 줄을 몰랐다. 이때부터 음지문화가 안식처가 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술과 담배와 속임수가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단지, 모친으로부터 따갑게 들었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배워도, “계집질과 도둑질만은 절대로 배우지 마라!” 마치 자명종처럼 이 두 가지만은 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음지생활을 하다 보니 홀로 지내는 데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무상(人生無常)에 깊이 빠져있었다가 인생을 포기하고픈 마음에, 위로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 죄와 벌, 자살클럽 등이 삶의 경전이 되어버렸다. 그 어린 나이, 중2에서 중3 동안 2년간을 방황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인생을 정리할 기회가 왔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오후가 되어서 영도다리로 발걸음을 걸었다. 아직 해는 하늘에 있었고, 분위기는 차분한 오후 때어서, 영도다리를 향해 걸어가는 중에 다리 밑에 노인이 담배꽁초를 주어 호호 불어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더욱 남일 같지 않았다. 더욱 인간의 허탈함을 부추겼다. 드디어 영도다리 중앙에 와 난간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릴까? 다리 밑으로 갈매기들이 날아가는 모습에 다리가 꽤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파도가 매우 거칠게 보였다. 이때에는 영도다리가 자주 들어 올리곤 했었던 것이었다. 결국 용기가 나지 않아 소주 한 병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깊은 밤, 텅 빈 방 안에 과도 칼과 소주병을 놓고, 배고픔도 잊는 채 홀짝홀짝 소주를 마시고 취한 상태로 자살을 하리라 결심을 했었다. 어느 정도 취하여 정신이 아롱거릴 때에 손에 든 칼을 바라보던 중에 갑자기 가족들의 모습들이 영화처럼 스쳐가기 시작을 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에 끝없이 이어지는 가족들의 생활모습에 넋을 잃고 있었을 때에,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고 말았다. 결국은 자살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빛이 살아갈 힘을 주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철학책이란 책은 찾아 읽었다. 물론 헌책방에서 구입해 읽었었다. 나중에는 동서양의 철학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론은 복잡하기만 할 뿐 해법을 찾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서 하늘 구름을 헤쳐 나가니, 지옥이라는 곳에 도달을 했었다. 거기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앙상한 모습에 목말라 허덕이며, 어떤 이는 불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어떤 이는 쇠붙이를 만지는 순간 악을 쓰며 몸이 녹아내리고, 여기저기 몸부림치며 발악을 해도 이상하게도 죽지는 않는다. 몸이 타올라 죽었나 보면 다시 꿈틀거린다. 깨어나고 보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때에 지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쐐기 박듯이 뇌리에 박혀버렸다.
이때부터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어릴 적에 교회를 놀러 다니던 것이 떠올랐다. 약국 문에 붙여있는 그림, 두 갈림길에서 한 사람은 천국 가는 길과 벼랑 밑에 불이 있고 한 도둑이 가는 길의 포스터가 떠올랐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때에 짧은 인생이었지만, 부질없는 삶은 아니었구나? 인간이란 존재는 무의미하진 않구나? 이때에 감동을 성경의 문구가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에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태 6:25,26,27,28)
이 말씀이 모든 철학이나 어떤 사상을 뛰어넘는 뜻이 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놀라게 한 성경의 문구가 있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이 말씀이 내 눈을 뜨게 하였다. 그렇구나, 인생이란 진리를 알아가는 길이구나. 이때부터 성경의 말씀들이 새롭게 보였고, 보물처럼 보였다. 이때에 성경이란 책은 왜 있을까? 한갓 종교적인 책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다. 이제는 확신에 확신을 주심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가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 중에 하나를 나누고자 한다. 즉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2,13)
그렇다. 인간관계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믿음이 없다면 유지될까? 또 소망이 없는 인간관계는 오래갈 수 있을까? 모성애, 우정, 연인사랑 등등에는 사랑의 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의 어떤 철학도, 종교도, 이 세 가지를 배제하고 논쟁이 무슨 의미가 되겠는가?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필수 항목이 된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인간관계에 있어서 시이소로 해석해보려고 한다. 다시 정리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문구는 무엇을 말하나?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그렇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나도 온전히 주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말인가?
여기서 인간관계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하나님은 보기 좋지 않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보기 좋지 않다는 것일까? 인간이 홀로 있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희비극이 발생함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한편, 노인들이 외로워하는 이유도 관계의 상실인 것을 아는가? 그리고 또 아이들의 상처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는가? 이 두 모두가 관계의 그릇됨에서 오는 것이란 것을 알까? 인간의 죄악도 바로 이런 관계에서 나타난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한 이유가 아담을 부려먹으려고 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랑을 베풀길 원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베풀다’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보통 사람들은, 아니 조선의 이념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베풀다’라는 것은 AI로는 남에게 은혜를, 도움을, 친절을, 돈이나 음식을 주어 혜택을 입게 하거나, 어떤 일을 차려 놓아 펼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또는 자비를 베풀다, 호의를 베풀다 등....... 그러나 여기에 조심할 것은 베푸는 자와 베풂을 받는 자의 위치적 관계가 숨어있다. 성경에서 매우 심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사람에 대해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왜 인간은 존귀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심히 보기에 좋았다고 하는 말에 숨겨있다. ‘좋았다’라고 하는 말은 매우 선하다, 진실하다, 옳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심에 원칙들인 것이다. 그러면 인간관계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시이소’의 원리를 생각해 보려 한다.
시이소의 원리는 지레의 원리이다. 즉 중심에 받침점이 있고, 양쪽에 무게를 달아 균형을 이루는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를 인간관계에 비춰보면, 그 중심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생각되며, 양쪽에는 인간관계를 이루는 두 사람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 있다가 아니라 놓여져 있다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잘나서, 똑똑해서, 특별해서, 관계에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배려나 예의는 자신을 위한 것처럼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니 슬쩍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숨겨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조선 오백 년 동안에 길들여진 백성들은 일제에 의해 양반제도가 사라지고 저마다 평등하게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족보까지 생겼으니, 누가 진짜 양반인지, 쌍놈인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자기들이 진짜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열심히 유교적인 조상숭배, 제사 등을 강조하며 가문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상을 제대로 섬기지는 않는다. 아니 섬길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로써, 시이소는 아주 적합한 예가 될 것 같다. 이제 시이소에 대해 알아보자. 아빠가 어린아이와 시이소를 타는 모습을 살펴보면, 아빠는 어린아이와 수평을 이루었다가 위로 올렸다가 내려오게 하며 즐거워한다. 물론 어린아이도 좋아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어린아이는 어떤 때를 더 좋아하는지......... 바로 수평을 이룰 때이다. 그러나 아이가 올라가고 아빠가 내려가면 아이는 두려워한다. 또는 아이가 내려가고 아빠가 올라가면 슬퍼한다. 그 이유는 아이는 자신이 높아있는 게 불안해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을 매우 불편해한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대체로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놀다가 서로 불편한 일이 생겨도 내색하지 않고 받아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겠다.
또 한편, 아빠가 올라가고 아이가 내려가면 아이는 불편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재미없어한다. 그거 아는가?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이 키가 커서 늘 위로 쳐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관계에서 아이들은 억눌림을 느끼고,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어른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주는 의미로 몸을 낮춰서 대화를 한다. 그러나 아이를 높이 쳐올려주면 아이는 까르르 웃는다. 그러나 마음은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와 같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옛 말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얼마나 이해할까? 바로 인간은 나이가 많든, 지위가 높든, 지식이 많든, 그러한 인간의 신분이 인간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가? 인간은 상품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은 이유에서 오는 것이다. 그때에 아담뿐 아니라 오늘날에 인간도 여전히 그런 아담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전히 선악의 열매를 먹으려는 욕망이 숨어있는 것이다.
왜 뱀이 그런 질문을 했는가? 아니 그런 대답을 했는가?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은 아신다.”」(창세기 3:4,5)
이러한 마음을 이미 아담과 여자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여전히 오늘날에 인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남보다 높아지기를 바라고, 남을 지배함으로써 높아짐을 느끼고, 남을 학대함으로써 높아짐을 확인하려는 것들이 바로 악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평등한 관계를 보이셨다. 그래야 대화가 통하고 거짓 없는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 언어의 맹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존댓말과 쌍말이라는 의식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소통이 가능하고, 얼마나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원래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 때에 백성들과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이였다. 그런데 후에 양반들에 의해 존댓말과 쌍말을 삽입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시이소의 원리는 평등, 즉 서로 존중해 주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준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인간관계에 대해 깨우치기 위해서 시이소가 좋은 놀이가 된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시이소를 통해 금방 깨닫게 된다.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러한 인간관계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배우며 서로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런 깊은 뜻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셨고, 바울을 통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는 평등한 관계, 즉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