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서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16,17절)」
So we are lying if we say we have fellowship with God but go on living in spiritual darkness. We are not living in truth. But if we are living in the light of God's presence, just as Christ is, than we have fellowship with each 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cleanses us from every sin. <1 John1:16,17>
--------------- Bible Word -------------
"나는 예수쟁이,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들 중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하는 자일까?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진리 안에서 살지 않는 자가 아닐까요? 영적으로 어두움이란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생활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늘 사귐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서로 사귐에 있을 때에 지은 죄들이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으로 말입니다.
[다시 깨달음]
모처럼 오래전에 엽서로 쓰였던 글들 중에 ‘하나님과 사귐’이란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 나를, 돌아보았을 때에, 얼마나 하나님과 사귐이 깊어졌을까?
물론 남 못지않게 교회에 열심이었지. 봉사에도 열심이었지, 직책에도 충실했었지, 결국은 조기 은퇴를 했어야만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왕따를 당하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선한 길을 택함에 교회에, 교인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식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그때에 당서기는 이렇게 물었었지, “교회에는 나오실 거죠?” “물론 교회에 나오지요. 하지만 개척한 친구목사의 일을 돕게 되어 가끔은 못 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나의 모교회(母敎會)를 어찌 잊을까?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갔다. 여전히 교회 소식을 들으며, 가끔 찾아갔었으나, 그동안 교회엔 새로운 교인들이 많이 늘었다.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은 염려가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몸을 담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었으나, 모든 직책을 내려놓은 후에는 범교인(凡敎人)이 되어있었다. 요즘엔 인터넷 사이트가 자유로워서 원격예배를 드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범교인이 아닐까?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찾아가며 설교를 들을 수 있어서 편리하고 좋게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허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란 실물이 되어야 그 의미를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범교인이 되다 보니 겉보기에는 매우 포괄적으로나, 다양한 관점에서 두루 많은 교제와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피상적인 것이어서 개인주의나 무책임의 일(사건)으로만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사귐이 없는 교제나 관계는 말 그대로 피상적(皮相的- 어떤 대상에 본질이나 속은 보지 않고, 겉보기,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모습이나 현상에만 관계하는 판단이나 태도 또는 상태) 일뿐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제삼자의 입자에 있은 관계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 이 세상을 등지거나 외면하거나 무관심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된 말씀, 즉 아브라함과의 약속, 이스라엘을 택하여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에서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게 하심으로부터 후에 선지들로 기록한 말씀들이 오늘날에 우리에게 전해질 수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가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사귐을 바라시는 의지를 보이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의 뜻을, 사실을 글로 전해지도록, 성경(聖經, Bible)으로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와 사귐을 바라시고 원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는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 18:20)」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함께 할 여자를 만드셨으며, 그들과 함께 나누고자 에덴동산을 마련해 두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담은 선악의 열매를 먹으므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셨다. 그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알게 하셨던 것이다. 종종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웃나라의 우상을 섬기는 것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또한 인류가 하나님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없다고 무시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한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
이 사실을 아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 6:26)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그 후에도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창조물 중에 인간을 더욱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인간을 돌보시지 아니하시겠는가? 그러나 인간세계에서 된 모든 일중에 불행한 일들, 죄악 된 일들은 인간들이 행한 결과들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할 일들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것을 택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하나님은 결코 간섭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아담)을 창조하시고, 곧바로 그에게 대화를 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시니라.(창세기 1:27,28)」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과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지금도 하나님은 인간과 사귐을 원하시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며,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며, 우리의 대화도 들으시며,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심은 우리의 죄 때문인 것이지, 그분이 숨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사귐을 바라시며, 찾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귐을 보고 기뻐하신다. 어떻게? 진실하게, 사랑으로, 서로 준중하며, 선한 열매를 맺으시길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으며, 성령의 열매를 따라 사귐을 바라시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사귐 가운데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며, 진리를 깨달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됨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처럼 서로 나누며 함께 함을 이방인들이 바라보고는 하는 말이 특별한 민족이라고 말했었다. 그러한 믿음의 공동체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먼저 가정에서, 이웃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아름다운 사귐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이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