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더 모호한 동양의 전통들은 생명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시작하며, 이 '아무것도 없음'이란 어떤 형태도 아니며 어떤 형태도 아니라는 생각조차도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이나 형태나 실존조차도 없는 '절대 무'이다. 말할 수 없고 시간도 아닌 어느 순간에 이 무의 바다 위에 잔물결이나 파도가 일어났고, 이 물결들이 어떠한 실존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무의 허공이 물결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무가 아니다. 일어난 물결은 알아보는 자의 형태였고 다른 말로 하면 그 자체의 거울이었다. 두 번째의 무인 셈이다.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앞으로의 천년, 미래의 역사/피터 로리 지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스님들은 임종 때에 하신 말씀이 '무', '허', '공'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의미를 신도나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저 감탄만을 할 뿐이었다.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무', '공'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불교의 핵심적 철학이거나 불심의 종교적 기반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호한 깨달음이다.
진정 그 본질은 무엇일까? 천지가 있기 전에는 어떠했을까? 무엇일까? 하는 것과 그곳으로 인간은 돌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무에서 태생하여 실존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무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경전을 이제야 서양인들이 놀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즉 무나 허나 공에는 아무것도 형태도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는 형태로 환영된 것들의 실존이라는 것이다. 이 환영 전에는 무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형태장 이론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에서 형이 나오고 형태를 나타내어 형태장이 형성되고 다시 그 형태들이 다른 형태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흐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끝은 무, 즉 두 번째의 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무' 이전에 전능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전능자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신론인 것이다. 이것이 신본주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