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책 속에 생각을 담다]

by trustwons

89.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흔히 유대교는 자비와 용서의 종교가 아니라 정의의 종교로 묘사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기를 바라거니와, 정의와 용서는 손을 잡고 나란히 가는 덕목이다. 저마다 복수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나, 어느 것도 단독으로 충분치 않다.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칙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로만으로는 피해자의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 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 마이모니데스가 말하듯 다른 길은 없다.

<차이의 존중 - 문화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유대 역사는 겉보기에는 복수의 연속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용서의 역사서이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하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고 정의의 종교인양 인식하고 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역사적 종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대하여 용서의 가르침인 것이다.

정의와 용서는 동전의 영면이라 해도 무방하다. 진정한 용서는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용서는 정의의 열매인 것이다. 용서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정의 없이 용서는 성립될 수 없다. 복음은 용서의 진리이다. 정죄하는 예배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용서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공포를 조성하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닌 것이다. 하물며,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공포정치를 하는 국가는 정의로운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의와 복수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특히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서도 살펴볼 수 있겠다. 또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겠다.

특히 한국의 육이오 전쟁에서는 철저한 이념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공산주의이냐 민주주의이냐 이였던 것이다.

이로써 수많은 일반인들이 학살당했으며, 군인의 죽음보다 민간인의 죽음이 훨씬 많았다. 이러한 이념 속에는 정의와 복수의 칼날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생각의 자유를 빼앗고, 좌냐 우냐 하면서... 마치 동전을 던져 앞이냐 뒤이냐에 따라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게임과 같을 정도였었다.

그러면서 북쪽에서는 미국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것은 일제 36년의 식민지에 각인된 감정을 악용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겠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조선 오백 년은 중국의 명과 청의 식민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특히 저들을 따르는 남쪽의 추종자들은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조선 오백 년의 정통성을 명분으로 삼아 국민의 이성을 혼란스럽게 하여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활용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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