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의 인내하심을 통하여 이 세계를 그의 모순들 또 재난들과 함께 담지하시며 그것을 견디어야 하는가?
기독교 신학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가장 높은 현실(summum ens)이며 순수한 행위(actus purus)이다.
모든 현실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현실에서 연역되었고 야기된 것이며, 이것을 가리키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일으키는 힘일 수밖에 없다.
비로소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 이후로 하나의 다른 형이상학적 생각이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가능성이 현실성보다 더 높다.” 현실성은 “실현된 가능성” 일뿐이다.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이 되지만, 현실성으로부터 다시 가능성이 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존재의 양태성을 미래와 과거의 두 가지 시간의 양태와 결합시킬 때,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이요, 과거는 현실성의 영역이다. 이리하여 미래가 과거보다 “더 높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미래로부터 되어지지만, 과거로부터 다시 미래가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성의 형이상학을 넘어 가능성의 형이상학으로 자리를 바꿀 때, 우리는 신적 존재를 가장 높은 현실성으로, 가능성들의 원천(Quelle)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능한 것을 초월적으로 가능케 함(Erm glichung)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과학과 지혜/위르겐 몰트만 지음/김균진 역>
먼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글자대로 해석한다면, 보이는 것을 넘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고 합니다. 기존의 보이는 것을 알아가는 것을 자연과학 또는 물리학이라고 한다면, 그 자연의 보이는 것을 넘어 생각하는 것으로 형이상학(形而上學)[Metaphysics]의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매우 매력적인 용어가 아닐까요? 그렇게 대중들은 인식하며 열등감에 순종 아닌 맹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인간의 지식들은 비논리적으로써 거짓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예를 살펴보면, ‘라면은 맛있는 음식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거짓인지를 아시나요? 맛이란 객관적일 수가 없죠. 주관적이지요. 즉 이렇게 말해야 거짓이 없어요. ‘나는 라면이 맛있는 음식이라 생각한다.’ 즉 자신이 그렇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맛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이런 것이 바로 비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이란 용어 자체가 매우 비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보이는 것을 넘어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황당한 표현입니까? 즉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든다면, 바로 대학의 논문입니다. 요즘은 대체로 통계학 자료에 근거해서 논문을 많이 씁니다. 그전에는 누구누구의 글을 인용을 많이 할수록 훌륭한 논문으로 인정했습니다. 그 논문에 기술한 내용에 대한 논리성을 평가하지 못하고, 인정된 자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대부분의 논문들은 비논리적이며, 거짓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형이상학의 뿌리는 어딜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여자가 선악의 나무 아래에서 뱀과 대화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하고 뱀이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비논리적이고 거짓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아닌 것이지요. 그럼 왜 이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갔을까요? 뱀이 무력으로 그리했나요? 아니지요. 결국 아담과 여자는 이미 마음에 있었고, 그걸 실천으로 옮긴 셈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뱀의 다음의 대화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창 3:5) 그러니깐 아담과 여자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뱀의 유혹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인간들은 이러한 비논리적 것에 쉽게 속습니다. 왜일까요? 너무나 거짓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초등 학문에서부터 거짓된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니 거짓에 익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 신학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가장 높은 현실이며 순수한 행위이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성경의 진리를 세상적인 지식을 수용하여 이해를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성경은 하나의 인간들의 책일 뿐입니다. 우선 형이상학적 논리는 자연적 물리현상보다 더 형이상학적이기에 얼마든지 논쟁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반박할 만한 검증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거짓이 끼어있다는 셈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피조물인 존재가 자신의 인지능력으로 창조주(창조자)를 이해한다. 이것 역시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성’과 ‘가능성’의 논리적 전개는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거짓이 너무나 깊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현실은 가능성에서부터 온다. 그러니 과거는 현실성에 속하고 미래는 가능성에 속하므로, 현실성은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고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은 것이므로 현실성보다 가능성이 더 높다. 여기서 높다란 말이나 맛이란 말과 같이 모호하며, 가능성과 현실성의 용어에서도 상당히 비논리적이며, 거짓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의 존재를 인간의 실존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범신론적 의미로 간주한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범신론이란 인간이 신을 창조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하나님도 역시 인간의 창조신의 하나라는 셈이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현실성과 가능성을 도입하여 해석하려는 것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엇이냐?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냐? 그렇게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며 유희하는 셈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저는 여기까지만 말씀을 해드립니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해하시고 해석하시길 바랍니다.
* 저는 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에 있어서 논리성과 합리성을 통해 진실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