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일망지하에 주는 영감

[책 속에 생각을 담다]

by trustwons


112. 일망지하에 주는 영감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궂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선생님은 내가 중얼거리는 옛시조에 말을 이어 또 이렇게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산에 자주 오르면 마음이 커진다. 산에 가면 호연지기가 가슴에 깃들고, 산에 가면 대오철저(大悟徹底)의 흉리에 솟아오른다. 옛사람들도 뜻있는 사람들은 흔히 산간에 초막을 짓고 경산조수(耕山釣水)하며, 청산도 절로 녹수라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유산유수처(有山有水處)에 무영무욕신(無榮無辱身)을 즐겼던 것이다.

낮은 산보다 높은 산이 좋다. 야산보다 심산이 좋다.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산보다는 인적 드문 적막공산(寂寞空山)이 더욱 좋다. 부전고원(赴戰高原)에 올라 한 번 백화요란(百花搖亂)한 고산식물을 보면 단번에 황홀 도취되어 다시 속세에 내려오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계룡산의 신비(神秘), 지리산의 유수(幽遂), 묘향산의 웅(雄), 금강산의 기(奇), 한라산의 이(異), 백두산의 수(秀). 정말 우리나라에는 명산이 수두룩하다. 금강산 비로봉은 해발 6천 척이다. 그 옛날 대학에 들어간 첫가을에, 심각히 인생문제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발이 금강산의 비로봉에 이르러 15분간 , 일만 이천 봉을 눈 아래 보고, 천하를 발아래 보고, 만국도성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바라볼 때, 나는 몇 년을 두고 독서삼매 몇 백 권의 책을 읽은 것보다 오히려 깨달음이 컸다.

나라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인생의 무상허무(無常虛無)를 그때처럼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다. 또 천봉만학(千峰萬壑)을 뒤덮은 청엽, 황엽, 등엽, 녹엽, 갈엽 등 만 가지 단풍을 눈 아래 바라볼 때에 나는 그때처럼 신의 천지창조의 비밀을 느껴본 적도 없다. 구만리장공(九萬里長空) 속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는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으며, 바르르 나무 잎을 흔들며 불어오는 소슬바람 속에 서서는 신의 숨길을 느낄 수 있었다. 단풍은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창공의 편편운(片片雲)과 소슬바람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앞뜰 뒤뜰에서 보는 단풍과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바람소리와 해발 6천 척 상에 인간의 가냘픈 두 다리를 디디고 하늘거리는 심장을 안고 바라보는 단풍과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바람소리는 주는 영감이 다르며 받는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영감]이 다르다. 결국 죽어 산으로 돌아가야만 할 인간에게 가장 적나라하고도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은 정말 산임에 틀림없다.”

<젊은 날의 노오트/ 정무심의 글>



이젠 낡아버린 책, 젊은 날의 노오트, 다시 열어 읽어보니 그때 사춘기 시절에 멋모르고 사색을 즐기던 시절에 내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였다. 임석영 선생님은 대학시절에 인생의 갈등이 있었나 보다. 그는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서서 천지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는 것에 산을 좋아하는 나로선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월악산, 도봉산 등을 다녀본 나로서는 정상에 올라 산 아래 펼쳐 보이는 작은 산등성과 마을들에서 느껴졌던 내 심정은 사람들의 사는 냄새를 느낄 수가 있었다. 어릴 적에 간장독에 연탄재를 넣어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던 나는 그만 집을 쫓겨나 뒷산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머물며 산 아래 집들에 비친 전등 불속에 사람 사는 행복을 느꼈던 추억이 있었다.

그렇다. 심산일수록, 고산일수록, 아니 인적이 드문 산일수록 자연의 심오함은 더 많은 것 같았다. 홀로 산을 오르다 인적이 드문 산자락에서 사람을 만나면 참 반가워야 하는데,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림은 무엇일까? 오히려 나는 뱀이나 멧돼지나 독거미나 지네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은 왜? 편하지 못할까?

임석영(林夕影) 선생님은 일망지하에 바라볼 때, 수년 수백 권의 책을 읽은 것보다 깨달음이 컸다고 했다. 역시 나에게도 그런 놀라운 깨우침이 있었다. 미국에 있는 그랜드 캐넌에서 깊고 깊은 골짜기와 광활한 계곡 그리고 지평선을 바라보았을 때에 대홍수의 흔적을, 지구가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 후에 나는 산을 오르나 바닷가와 갯벌을 보아도 나는 홍수의 흔적과 재창조를 연상하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 하늘 구름의 경계선과 바다의 경계선 그리고 오존층 등에서 놀라운 자비를 느꼈었다. 난 일망지하가 아니라 천상지하에서 영감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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