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일곱 여학생의 시선을 받으면서 선생님은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렇지. 나도 경혜의 의견에 동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이란 자기가 처해있는 환경을 가장 잘 살리는 데 있는 까닭이다. 임 정애가 한 달 후에 결혼을 한다고 하여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미 여자 20이 아니냐?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내 어머니는 열일곱 살 되는 정월에 시집을 오셔서 그 해 섣달 그믐날에는 내 누이를 낳았고, 또 열아홉 살인 동짓날에는 훌훌 불며 팥죽을 잡수시다가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듣고 있던 모든 입마다에서 경이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은 또 어떤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시어,
“오크 워드 <awkward>란 소위 「남녀 십칠·팔세의, 특히 여자의 십칠·팔세,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장 부끄러움과 간지러움을 잘 느끼는 나이」를 말함이다. 나는 여자가 아니므로 잘 모르지만, 그러나 아마도 내 관찰에 잘못이 없는 한, 이런 나이의 여자 특히 여학생들은 부는 바람소리에조차도 간지러움을 느끼며, 꺾인 나뭇가지에도 부끄러움을 탄다. 얼마 전까지도 그럴 줄 모르던 처녀들이 갑자기 푸른 공상에 잠기게 되며, 또 눈에는 까닭 모를 애수와 눈물과 그리움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것도 다 이 <오크 워드 에이지>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 이런 나이의 소녀들의, 처녀들의, 여학생들의 눈 속에 깃들어 있는 그 까닭 모를 슬픔을 보라. 그 아득한 시선을 보라. 무엇인가 그리움이 있기는 하나 걷잡을 수 없어 애달파하는 그 애수의 눈방울들을 보라.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 없어도 소녀 십오·육 세면 벌써 깃들기 시작하는 무엇인가 모르지만 <그리움>, 무엇인가 모르지만 <동경>, 무엇인가 모르지만 <푸른 꿈>이 소녀들의 가슴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이러한 까닭 모를 슬픔, 이러한 오는 곳 모를 애수, 이러한 헤매는 마음, 이러한 말하기 힘들고 눈물만 글썽거리는 시름, 울먹이는 가슴, 사무치는 그리움, 안타까운 아쉬움, 이름다운 괴로움, 이러한 지순의 비애, 이러한 순정의 애달픔을 무어라고 그러는지 아나? 스위트 소로 <sweet sorrow>라고 그러는 것이다.”
학생들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일어났다.
<젊은 날의 노오트/ 정무심의 글에서>
읽고 또 읽어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젊은 날의 노오트의 글에서 저자의 순수함을 엿보게 된다. 아니 그 시절에 선생과 제자들의 모습을 살짝 들여다보게 된다.
그 시절에는 겨울도 매섭게 추웠다. 그런 추위에서 벗어나 5월 초에는 누구나 설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니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마도 스위트 소로와 같은 달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봄을 좋아한다고 한다. 어쩌면 여성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맑고 보드라운 마음을 지닌 여자가 있었기에 인류는 아직 멸망이 좀 더디 오는 것은 아닌지…….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은 제일 먼저 빛을 만드시고, 맨 나중에 여자를 만드셨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빛이 생겨나면서 시간과 공간이 형성되면서 존재할 수가 있었다면, 여자가 있었기에 생명을 출생하고 유지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어둠의 세력의 추종자이면서 용사들이라는 남자……. 오늘날까지의 인류에서 증명되는 이들의 권세와 흔적들…….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빛과 어둠, 선과 악, 여자와 남자…….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창조하신 그분은 남자를 통해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산을 걸으면 꽃들이 보이고, 도시를 걸으면 여인들이 보인다. 꽃과 여인, 이들이 있기에 아직도 아픔도, 괴롬도,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회복되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은 하늘에 해와 별과 달을 심듯이 이 땅 위에 나무와 꽃들을 심어놓으셨고, 인류를 위해 여인을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닐까?
그런 놀라운 비밀을 육십 여생을 지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종교를 통해 거룩한 척하거나, 학문을 통해 고상한 척하나, 재물을 통해서 고귀한 척하나, 권력을 통해서 우월한 척하나 진실이 가려진 그들에게는 최후가 늘 비참했다.
특히 그들의 공통점은 연약한 여인에 대한 학대와 지배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감추려고 했었다. 그러나 꽃이 다시 피어나듯이 여성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시들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아니겠는가?
나는 깨달았다. 왜 여성에 신비한 ‘스위트 소로’가 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에덴동산을 잃은 신의 마음을 여성에게 머물러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담에게는,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라고 하였고, 여자에게는,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라고 예언하셨다. 왜 출산의 고통일까?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에 대한 고통을 깨닫게 하심인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