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짝 잃은 까마귀가 깊은 산골짜기를 까우까우 울며 날아가면 벌써 머리 위에서는 별이 하나 둘 돋기 시작한다. 이런 때면 고요히 눈을 감고 우주가 회전하는 영원의 수레바퀴 소리를 죽은 듯 귀 모아 들어보라. 홍진만장(紅塵萬丈)의 도시를 떠나 때로는 외로운 팔베개를 베고 별을 손으로 잡을 듯 깊은 산 돌 위에 호젓한 잠을 자 보라.
산심야심객수심(山深夜深客愁深)《산이 깊고 밤이 깊고 나그네의 시름이 깊도다》
저 죽장에 삿갓 쓰고 행운유수를 따라, 동가식서가죽 방랑삼천리 하던 고독의 시인 김삿갓(金笠)이가 아니라도, 깊은 산에 밤이 깊으면 나그네의 시름도 또한 눈물겹도록 깊어짐을 금할 길이 없으리라.
소쩍새 우는 밤이면 활짝 핀 배꽃 아래 달빛이 유정하다. 달밤 무너진 옛 성터를 거닐다가는 목련화 그늘 아래 다리를 쉬어 감을 잊지 말라. 황성 옛 터에 밤이 오니 월색이 고요하며, 인걸은 간 곳 없는데 간들 부는 바람 소리만이 길손의 눈물을 자아내어 주리라. 가을 언덕 위에 서서 가을바람에 너울거리는 갈대를 오래도록 바라보라. 그리고는 돌아오다가 오동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또 가랑잎이 발밑에서 데굴데굴 굴러감을 바라보라. 아직 봄꿈이 깨기도 전에 벌써 천하에 이미 가을이 깃들었음을 알리라.
외로운 밤길의 풀벌레 소리를 들어보라. 잠 안 오는 밤이면 산 너머 들려오는 먼 개 짖는 소리를 들어보라. 만화방창(萬和方暢)의 봄날 숲 속을 거닐다가 새의 숨 가쁜 짹짹 소리가 나면 그것은 춘치자명(春雉自鳴)의 장끼가 까투리를 부르는 안타까움의 소리임을 알라. 가을밤에 기러기가 울며 날아가는 소리는 창가에 달빛과 더불어 못 잊을 사람을 또 한 번 애달피 생각하게 한다.
자연과 사귐에 있어서는 때의 구별이 필요치 않다. 밤도 좋고 낮도 좋으며 아침도 저녁도 가릴 것 없다. 봄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며, 여름은 성장과 무성의 계절이다.
조락의 가을이 시인의 마음을 서글프게 하여 주는가 하면, 삭풍이 나무 끝에 부는 겨울은 계절이 주는 심오한 맛에 있어 단연코 이를 따를 다른 계절이 없다.
하루의 가장 큰 비밀은 새벽에 있다. 가을 새벽이면 서릿발이 깊은 낙엽을 밟으며 한적한 길을 걸어가 보라. 겨울이면 새벽부터 고목 위에 벌레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에 잠을 놀래고, 봄이면 뒷동산에 구슬피 우는 멧비둘기 소리에 놀라 자리를 차라. 여름이면 이슬 길을 밟으며 홀로 잔월효성(殘月曉星)의 산길을 가라.
《이슬 길을 밟는 맨발의 소녀》란 말도 있거니와, 아닌 게 아니라 간밤에 풀잎마다 송알송알 이슬방울을 담뿍 맺힌 이슬 길을 밟으며, 남이 밟아보지 않은 숫 길을 사뿐사뿐 걸어가 보는 것은 참으로 상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세상에 더럽힌 마음의 부정이 단번에 씻기어지며, 혼탁한 세상의 티끌이 깨끗이 정화되어 감을 느끼게 되리라. 또 이런 때면 필연코 벌써 노고지리가 끝없이 푸른 하늘에 높이 떠서 새 아침을 노래하고 있으리라.
날이 들면 햇볕과 속삭이고 바람이 불면 바람과 밀어(密語)를 하라.
가을밤 부뚜막의 귀뚜라미 소리는 무덤 저 쪽의 비밀을 말하여 주는 것 같으며, 깊은 밤 아련히 들려오는 해조음(海 潮音)의 고함소리는, 눈앞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창조의 비밀을 소리치고 있는 듯하다. 햇볕과 푸른 하늘을 주되 또한 흐린 하늘과 눈과 비와 이슬을 주는 자연에게 감사하라. 인간이 받는 자연의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아마도 틀림없이 비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말없이 다정하며, 낙엽 지는 가을에 투덕투덕 새벽부터 지붕을 치는 늦가을 찬 빗방울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비는 비이되 오는 비마다 그 빗발의 굵고 가늠이 결코 같지를 않다.
깊은 밤 남모르게 홀로 느껴 우는 소녀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진눈깨비. 오는 듯 마는 듯 소리 없이 아물아물 내리는 안개비. 해가 지자 속삭속삭 내리기 시작하는 이슬비. 가늘고 성글게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 그칠 줄 모르고 종일토록 주룩주룩 내리는 가랑비…….
무더운 여름날 메마른 땅에 먼지가 펄펄 일 대, 아득한 수평선에 떠오른 한 조각의 구름이 은근히 피어올라, 도랑에 물이 펑펑 흐르도록 한바탕 비를 쏟고 가는 소나기의 상쾌함이야 이를 어디다 비길 수 있으랴.
<젊은 날의 노오트/ 정무심의 글에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산을 오르기를 즐겨한다. 하지만 왜 산에 가느냐 하고 물으면,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고 우매한 산악인이 한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외에도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산을 오르는 이유를……. 아닌 산이 왜 있는지를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도시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는 자연이라 말한다면 산을 떠올릴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는 자연이란 그림 속에 있을 자연으로만, 가끔 TV에서 방영해주는 정도로 인간과 분리된, 별개의 대상일 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 인간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자연만큼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건강을 위해 힐링(Healing)의 숲으로 산업화하였을까? 이제는 자연은 불편한 관계나 인공 숲으로 대체하려는 것을 문명인의 정석인 듯이 자랑까지 한다.
왜? 창조주는 노아홍수 이후에 지형(地形)을 재창조했을까? 왜? 오르기 힘든 산들이 있을까? 홍수 이전에는 그렇게 높은 산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힘들게 올라가야 할 산들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홍수 이후에는 지면이 더 낮아졌으며, 높은 산들이 있고 많은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또한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도 홍수 이전보다 더 넓고 깊은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인본주의와 진화론적 이념으로는 엉뚱하게, 약육강식의 생태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 그러면 거부감을 느끼게 되고, 도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초등교육에서부터 교육되었고, 인식되게 의식화했기에, 자연에 대해 친근감이나 우호관계로써 그리고 창조주의 비밀을 알기엔 먼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연은 결코 인간의 적이 아니며, 도전의 대상도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벗이며 친구이다. 즉 보화와 같은 것이다. 아직 인간의 지식이 학문화되기 이전에는 무엇으로 인간은 지식을 얻었을까? 그것은 곧 자연이라는 교과서인 것이다. 인간들 속에서는 사회를 배우듯이, 자연에서는 창조의 비밀을 배우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연에는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많은 것을 품고 있다. 하물며 하찮은 풀들에서도 얼마나 인간의 약초가 되는 것들이 숨겨져 있는가? 그러므로 현자들은 자연을 바라보라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가?
자연을 가까이하여 벗이 되어 준다면, 자연과 밀어(密語)를 나누게 되고 속삭임에서 지혜를 얻고, 건강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