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월 ○일
오늘《映美》가 졸업장을 들고 인사를 왔다. 졸업〔앨범〕의 첫 페이지를 펴놓으며,
“일생의, 그야말로 일생의 양식이 될 말을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손을 모으고 비는 포즈를 했다. 내가 그런 굉장한 말을 쓸 줄 아느냐고 했더니, 영미 뜻밖에도 너무나도 멋있는 말을 하지 않는가!
“겸손도 지나치면 일종의 교만이 된다고 들었어요!”
하하하하. 참으로 오랜만에 통쾌스러운 웃음을 웃어봤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서,
누구나 한 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
《너는 땅 위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영미는 참 좋은 말이라고, 참 감사하다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이 말을 좋아할 사람이라면, 그의 몸엔 이미 《천사의 날개》가 돋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산 설고 물 설은 곳, 낯선 땅 찬 자리에, 돋는 해 지는 달, 봄바람 가을비, 얼마나 애써 얻은 졸업장이냐!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는 것이니, 밤은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그렇다. 언제 보아도 영롱(玲瓏-금옥이 울리는 맑은 소리) 한 두 눈에 넘치는 재기(才氣). 영미의 눈동자 속에는 맑고도 깊은 『노래하는 마음』이 뛰놀고 있다. “singing spirit"가 뛰놀고 있다.
왜 그런지 영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내 생각이 자꾸 나 못 견디겠다. 눈이 닮은 까닭일까? 웃음이 닮은 까닭일까? 아내도 영미처럼 눈동자로 웃기를 잘했다.
영미의 앞날의 행복을 빌다! 또 영미의 호흡마다, 걸음마다, 생각마다, 날마다, 주의 큰 손이 항상 같이 하실 것을 손 모아 빌다!
<젊은 날의 노오트/ 정무심 글에서>
정무심 선생은 임석영 선생님의 일기장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에 서울 영미의 집의 다락에 정선생과 임 선생은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인민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미가 마당으로 나왔을 때에, 임 선생의 지인 교수의 밀고로 인해 퇴각하는 인민군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영미에게 임 선생은 어디 있느냐 묻자. 모른다고 했지만 영미에게 총을 겨눈 인민군이 협박을 하자 임선생은 다락에서 내려오면서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니 영미를 보내주시오.”
그러나 인민군은 임 선생과 영미를 함께 북으로 끌고 갔다. 홀로 다락에 남아있던 정선생은 이렇게 임 선생님을 그리워 글로 남겨놓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임 선생님의 일기 일부를 함께 소개하게 된 것이라 했다.
그렇게 임석영 선생님은 북녘에서 함박눈이 내리던 밤에 헌팅캡 쓴 사람들이 아버지를 데려가고, 자리에 눕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누님은 결혼하자 곧 죽고, 덧없이 살아온 임 선생은 기구한 여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얻었으나 겨울에 홍역을 두 다 죽고, 다음 해에 같은 날에 아내도 세상을 떠났던 것이라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인민군은 임석영 선생을 잡아갔을까? 아마도 그의 부친은 반동분자로 숙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동분자의 자식이기 때문에 끌고 간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토록 영롱하고 재기가 넘치는 제자 영미를 축복해 주었는데, 결국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에 얼음 못이 박힌 듯 심히 마음이 아리다.
이러한 비극이 전쟁 중에는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 부활절 주일이었다. 미군들을 대부분 휴가를 나간 후였다. 갑자기 밀려온 인민군에 부산까지 밀려났다 기적적으로 되찾은 남한 땅에는 이처럼 뼈아픈 상처를 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에게 조심히 백합화 한 송이를 받치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