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아름다운 관계
[책 속에 생각을 담다]
by trustwons Jan 11. 2023
129. 아름다운 관계
선생님의 일기 속에 내 이름이 한 번이라도 기록된 곳이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영광일까? 있다면 얼마나 행복일까? 있다면 이제 죽어도 한이 없겠다! 왜냐하면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여러 번이면 여러 번일수록) 나라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도, 황송하옵게도, 선생님의 천만 가지 생각 중의 하나로서 선생님의 거룩하신 머리 한 구석을 스치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는, 그런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12시! 밤은 깊어 삼라만상 <森羅萬象>이 고요! 주무실까? 꿈을 꾸고 계실까? 무슨 꿈을 꾸고 계실까?
어떤 날 선생님은 권에 못 이겨, 늘 놀러 오는 여대생들인 몇 학생들과 같이 승가사(僧伽寺)에 가셨던 일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도중에서 다른 학생들과 갈라져 드디어 선생님과 지양만 걷게 되었다. 여기서부터의 일을 지양은 그 일기 속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길은 한적하다. 정적 바로 그대로다. 간혹 나무꾼이 한 사람 두 사람 멀리 보일 뿐이다. 선생님과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유난히 커졌다. 그러나 말없이 걸어가면서 나는 나대로 또 말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나와 선생님이 계셔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 선생님! 말이 좀 달라지는데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나 다 바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질까요? 정말 무엇이나 다. 목숨까지라도.』
『그렇지. 진정으로 사랑하다면 그런 심정이 되는 법이야. 살도 뼈도 몸도 혼도 이목구비 · 오장육부 · 사지백체를 다 아낌없이 바치고 싶은 법이야.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식에게 대한 어버이의 사랑이지. 그런데 영미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선생님은 남은 진실하게 말하는데 농으로만 취급하셔.』
『농은 왜 농? 나는 거짓을 미워한다. 인생은 장난이 아닌 까닭이다. 「롱펠로」가 말한 것처럼 Life is earnest다. 왜 내가 거짓말을 하니? 정말 그런 심정이 되는 법이야. 그런데 영미…….』
『네? 왜 또 이렇게 갑자기 심각해지세요? ……. 씨…….』
『영미는 속으로 죄짓고 있지 않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알면서도.』
『정말 모르겠어요.』
『그럼 말하지. 영미, 지금 우리들은 이렇게 아무도 없는 데서 둘이 걷고 있지?』
『네!』
『하늘은 푸르고, 좌우 숲 속에서는 새가 울고, 땅에서는 꽃이 피고 나비가 춤을 추지?』
『네!』
『그리고 …….』
『그리고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못 누를 웃음이 자꾸 치밀어 올라요. 그거 무슨 웃음인가구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물으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어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 가까이 있을 때 행복을 느껴요. 그리고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죽기보다도 싫어요. 거 왜 그런 가구요? 왜 죽기보다도 싫은 가구요? 선생님이 좋으니까요. 좋다는 건 무엇인가구요? 보고 보아도 또 보고 싶다는 거요. 보고 싶다는 건 무엇인가구요? 선생님, 저는 책을 보노라면 책장마다 자구 나타나는 얼굴이 하나 있어요. 아니, 한 거룩한 얼굴이 계셔요. 누구의 얼굴인가구요? 선생님의 존안(尊顔) 요. 선생님 저는 밤마다 꿈을 꾸곤 해요. 무슨 꿈을 꾸곤 하는 가구요? 선생님의 꿈을요. 꿈은 왜 꾸곤 하는 가구요? 보고 싶어서. 가슴이 저리고, 눈알이 저리도록 선생님이 자꾸 보고 싶어서요.』
이때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하도록 발끝으로 돌을 찼다.
『아야야…….』
『왜 이래, 영미? 정신을 어디다 두고 발 앞에 있는 돌도 못 보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호호호호호........... 호호호.........』
『왜 대답을 못해? 왜 대답을 못하고 웃기만 해, 영미?』
『호호호호호…….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선생님 모르시죠? 인간은 <사고의 자유와 비밀>이란 굉장한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저는 바로 이 순간 지금이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호호호호.........』
<젊은 날의 노오트 /정무심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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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사제지간을 볼 수 있을까? 특히 오늘의 세대에서 말이다. 자존심이 강한 이 세대에는 타인을 존중할 줄을 모른다. 핵가족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 특히 사람을 멀리하기까지 해서라도 애완용 개를 자신보다 더욱 사랑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만큼 인간은 인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신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단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어떤 물리적인 관계로 구속이나 속박을 받고 있을 때에서야, 비로써 절대적 순종과 복종으로 안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필요한 가치이며, 두려움의 산물이라고 여겨지기에 억지로라도 외면하거나 망각을 하려고 애쓴다.
여기 지영미 양은 임석영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인 지식을 배우려는 열성과 순수함에서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고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편 임 선생님 역시 사랑하는 제자의 순수함에서 더욱 진실함을 보이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 아니라 정 선생님이 친히 지양의 일기에서 찾아낸 정말로 아름다운 관계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실 80년대에만 해도 사제지간에 이처럼 순수한 관계를 있었던 것으로 안다.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나 역시 그러한 오랫동안을 사제지간을 유지해 온 제자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제지간도 동료관계도, 우정도, 이웃도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관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토록 오래 지속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나의 지인은 나의 군대생활에서 알게 된 한 가정을 수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왕래한다는 것을 보고 심히 놀라워했다. 아름다운 관계는 진실한 마음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