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에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장 33,34)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Mattew6:33,34]
많이 듣는 말씀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외치는 사람에서도, 가르치는 사람에서도, 찾아볼 수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다.
성경의 본문을 읽고 또 읽어도 이해되지 않으며, 깨달음조차 얻기 힘들다. 막연하게나마 소중할 거라 믿어질 뿐이었다. 정말, 진실한 마음이라면, 이 말씀을 알고자 하지 않을까? 정말, 참 믿음이라면, 이 말씀을 깨닫고자 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YMCA에서 운동을 마치고 찜질방에 들어와 홀로 있을 때에 문뜩 내 생각을 지배하는 메시지에, 말씀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에 나는 몰입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는 듯하면서 알지 못하기에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가? 그때에 떠오르는 말씀, 예수가 가르쳐준 주기도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말씀이셨다.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직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았으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예수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시매 그가 말하며 보게 되었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생각을 아시고,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와 동네와 집이 제대로 서지 못한다고 하시고, 사탄은 서로 분쟁하여 제대로 서지 못함과 오히려 그들이(사탄의 종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된다고 하시고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는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But if it is by the Spirit of God that drive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Mattew 12:28)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함에는 아직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셔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아끼시고 미루실까? 하나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신다고 믿는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예수의 행적들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니 승천하실 때까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두 가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는 인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이분법, 이원론 사상에 의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세상에 살면서 저 멀리 있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라고 한다. 또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세상을 포기하라고,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 적당히 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도 괴롭고 힘들며, 마치 이방인처럼 살게 된다. 아니 세상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멸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세상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 애착이나 미련을 갖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인처럼 뜬구름을 잡듯이 날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부르짖고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며, 때로는 이 땅에, 때로는 저 세상을 왔다 갔다 의식하며 산다. 그러면서 멀리서 바다를 바라보듯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는 이미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안에 살면서 세상을 지혜롭게, 진실하게 살아 가려는 참 그리스도인이 있다. 이들은 세상과 이분법으로 살지 않는다. 아니 살지 않으려고 날마다 힘쓰고 있다. 그래서 말씀으로,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힘쓴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다. 바로 노아가 그러하며, 아브라함이 그러하고, 다윗이 그러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다.
세상을 등지고 오지에서 홀로 사는 수도원에 수사들이 아니었다. 교회사회와 세상을 구별하며 이원론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이미 점령되었으며,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거짓과 맞싸워 진실하게, 불의와 싸워 의를, 악을 멀리하며 선으로, 흔들리는 신앙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믿음을 확신하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심같이 말씀으로 호흡하는 삶이 되어야 하고, 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아 방황하는 것처럼 되지 않도록,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하고,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직면하고 믿음을 가졌기에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 감사함으로 믿음을 확고히 하는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인 것이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형통해서 고통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삶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곧 그는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데 고통과 괴로움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희망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