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빌립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선지자들이 말하는 그를 우리가 만났다고 하면서 나다나엘에게 말하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그가 반문하자, 와 보라 하였다. 나다나엘이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오니,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그 속에는 간사함이 없도다 하였더니, 나다나엘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므로 놀라고,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으니,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느니라.”라고 대답하자, 나다나엘은 더욱 놀라고 “선생님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빌립이 부르기 전에 그가 올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가 자신을 먼저 알았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여기서 나사렛에 살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다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라고 놀라운 말씀을 덧붙이신다. 그 큰일이란 무엇인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진리를 알라 너희가 자유케 된다/최희원 글/ 정문사>
우리는 언제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하고 물어볼 수가 있을까? 대부분 우리는 그냥 누군가 전도해서 믿었을 뿐이고, 부모님 따라 교회에 다녔을 뿐이고,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을 뿐이고, 또는 선물을 준다고 해서 매년 성탄절에만 갔었던 것뿐이었다.
언제 예수님이 너는 ‘참 인간’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을까? 그저 교회당을 다니니, 스스로 난 참 인간이라고, 난 간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나다나엘, 그 사람은 전통적인 유대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매우 애국자인 듯하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냥 조용히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말하는,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다나엘이 우연히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습관처럼, 아니 묵상하기 위해 적당한 장소로 무화과나무 아래를 택하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탁한 유대사회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일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그를 우연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을 뿐만으로 그를 알았을까? 딱 한번 보고서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신뢰가 되는 말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을 때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신에게 임함을 알았다. 즉 예수님은 세례를 받은 후에는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볼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영적인 분이셨을 것이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들을 보면, 또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대화를 할 때에도 저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저들의 질문에 분노하지 않도록 적절한 말로 응대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미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분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아무나 택하시지 않으셨으며, 나다나엘의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이 주시다’라는 예지(豫知)에 따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가르쳤던 것이었다. 그중에 하나인 나다나엘도 제자로 택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를 내가 받으리라고 했다. 그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도(바울도 포함) 성령이 충만한 후에는 성령의 예지에 따라 순종하였으며, 진리를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시지 않으셨으며, 빌립이 그에게 예수 선생에 대해 전해주자 그는 자진해서 예수 앞에 온 것이었다. 그때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이름에서 강조할 뜻이 있었던 것이었다. 즉 예수님이 불러 택한 제자들은 나다나엘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다나엘’(하나님이 주시다.)에 따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우리가 도서관에 가서 성경책을 펴서 읽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았다고 말할까? 역사책에서 예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교회 근처에 살다 보니 예수를 알게 되었다고 말할까? 부모가 믿었기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할까? 친구가 전해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할까? 이러한 생각은 내 의지에 따라 예수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고 하는 인본주의적 인간주권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을 대단한 자기 공로, 유대인의 선민사상, 조선의 선민사상, 이러한 이념의 틀 안에서 믿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거룩함을 나타내는 교황과 같은 신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접 나다나엘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빌립을 통해 그를 택하신 뜻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은 이미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은 자인 것이다. 그것을 깨우치시려고, 예수님께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물론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었기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왔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택함을 받은 자, 그들이 추수할 대상인 것이다. 그들에게 누군가가 빌립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바라시며, 추수할 일꾼을 부르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택한 자녀는 곧 전하는 자의 말에 복음을 받아들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그 추수할 자들이 다 추수할 때까지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추수함이 끝날 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처럼,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주님 앞에 고백할 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진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실하다. 진실한 사람은 진리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게 된 자는 세상에서 자유 함을 누리며 살게 된다. 그 진리는 무엇일까? 나다나엘이 고백한 것처럼, “당신은 예수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왕 중에 왕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참, 그 큰일이 무엇일까?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후에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게 되는 일이다. 이때에는 하늘에 천사들이 바쁘게 움직이었다. 그리고 지하에 무덤이 열리고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간 사실인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아버지께 보인 후에 사십일 동안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가르치셨다. 곧 있을 성령의 역사가 시작됨을 말이다. 지금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인 것이다. 성령이 믿는 자에게 임하고 함께 하며 복음을 전하는 추구꾼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