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6. 거기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그가 거기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이미 오랫동안 앓아 온 것을 아시고 물었다.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39. 너희가 성경 안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구나. 성경은 바로 나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42.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4.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정작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얻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겠느냐?」(요한 5장 6,25,39,42,44)
------------- Bible ------------
유대사회에는 ‘베데스다’라는 못으로 질병을 고쳐주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도 그들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비를 베푸셨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도 ‘하느님’이라는 어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불교에서도 하느님이 나온다고 한다. 토속신앙에서도 여러 잡신들보다 강한 신으로 하느님을 부른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든지, 신선이 내려와 어려움을 도와준다든지, 선녀가 내려와 구해준다든지 하는 옛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원의 표현이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의미는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삼십팔 년 된 병자도 예수를 몰랐지만 유대문화 속에서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는 베데스다 못의 기적을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못의 시적에 대해 아무 말도 언급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보셨고, 또한 자신에게도 그 능력을 보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즉각적으로 믿음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바로 이 때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 일로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진리를 알라 너희가 자유케 된다/최희원 글/ 정문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위기에 청하게 되면 항상 하늘을 바라보거나 하늘에 아버지를 찾는다. ‘오, 하느님!’, ‘O, my God!’ 또는 힘들이 생기면, ‘어머니!’ 하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몰라도 말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베푸시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버렸어도 말이다.
여기 베데스다 못(작은 연못)에서 일어나는 기적,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을 때에 먼저 들어간 환자는 쾌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동방에도 많이 있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많다. 우리는 때대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면 기적이라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서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행운으로만 여기고 넘어간다. 그러하니 예수님은 눈먼 자를 보게 한 이적을 보이셨다. 그리고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꼭 이 말을 하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사실 아담과 여자가 에덴동산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이들을 떠나지 않으셨다. 또한 가인과 아벨이 수학한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올린 것으로 보아,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늘제’를 들여왔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아의 후손 중에 야벳의 후손들은 바닷가를 중심으로 각각 언어와 족속을 따라 민족을 이르며 살았고, 함의 후손들은 평야에 거하며 여러 민족으로 살았다. 그중에 유명한 니므롯이란 영웅이 나타나서는 흩어지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샘의 후손, 또는 에벨의 후손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에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의 아들인 벨렉이 태어날 때에는 민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벨렉의 후손들은 그곳에 살았고, 에벨의 둘째 아들인 욕단이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민족들이 흩어져가는 때었을 것이다. 그래서 욕단의 후손들은 동쪽 산간지대를 따라 이동을 하였다고 한다. 주로 산악지대에 거주하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 욕단의 후손 중에 한 민족이 동쪽 끝 산간지역인 백두산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민족은 그냥 이주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민족은 산을 넘고 넘어갈 때마다 ‘알이, 알이’, 즉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동쪽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별나게도 한민족[韓民族](하나님의 민족이란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만은 산 정상 곳곳에 제단을 쌓았던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에게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다.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천제를 드리는 풍습이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그 외에도 많은 설화나 풍습들이 유대민족과 비슷한 면들이 많다. 그런 한민족인 고조선의 후손들은 그런대로 바르게 살아왔었다. 그런데 고려 말에 등장한 이씨조선(여기서 조선의 국명은 명나라에서 하사 받은 국명임)이 등장하면서 적폐청산의 명분으로 불교를 탄압하였으며, 신종교로써 유교사상을 받아들여 조상숭배와 공자의 유교(儒敎)를 종교화 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현대인들은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이씨조선시대는 한민족의 조선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인본주의 뿌리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원조인 셈이다. 오백년의 암흑시대에는 소수 양반사회 외에는 천민사상(민초)으로 모두 무지한 짐승같은 인간들이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이름엔 성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글도 모르는 자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무지한 백성을 잘 부려먹으려니 쉽고 간단한 한글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글 속에는 신분이 있고, 계급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첫 말씀에서부터 유대인의 절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 ‘양의 문’의 근처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서 여럿 각종의 환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38년 앓고 있는 자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은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말했다. 그 환자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다. 나중에 성전에서 그를 예수가 다가가서 말했을 때에 그는 예수님을 알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 이때에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욱 담대하게 말씀을 하셨다.
“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맡기셨다. 이는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것에 놀라지 말라!”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부활해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부활해 심판을 받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니……. 그 이유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영접할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얻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위에 열거한 말씀들을 읽는다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교회와 교인들이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나 여전히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강조하여 말하고자 함은, 진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마태 5:8)라고 가르쳤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깨닫게 되고 돌아오며,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고 말하고 싶다. 진리를 깨달아 아는 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남에 놀라지 아니하며, 기이히 여기 지도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