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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누구의 죄입니까?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18. 누구의 죄입니까?

『제자들이 예수께,“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공동번역, 요한 9:2~7)

-------------- Bible ------------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하여 제자들은 예수께 물었다.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누구나 살면서 의문을 많이 갖는 것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소경에 대한 것 이외에도 의문이 많았을 것이다. 한 제자의 질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는 자신의 죄도 아니요,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대답하셨다. 얼마나 신비한 대답이신가? 그리고 성경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 대한 배경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가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는 말씀이 언급되고 있다. 때가 낮이라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에 침을 발라 이긴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실로암 못에 가라 하신 이유가 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즉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소경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소경의 소재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가르쳤고, 자신이 하니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셨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회복의 뜻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상실된 인간의 회복인 것이다. 점점 인간들은 변질되어 가고 있다.

<진리를 알라 너희가 자유케 된다/최희원 글/정문사>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하거나 놓이게 되는 일이 참으로 많다. 그럴 때마다 의문을 가지게 되고, 때로는 하늘을 향해 하소연하면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역시 이렇게 글을 쓰는 자신도 그런 하소연을 참 많이도 했었다. 아니 지금도 그런다. ‘왜? 하나님~’, ‘보고만 계시나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영어에서도 그러지 않는가? ‘O, My God!’(오 마이 갓!), ‘오 하나님 아버지!’ 나면서 소경 된 자? 그래서 나는 한 여인을 선택하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하지 못하는 그녀를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심정으로 「어둠의 사십 년」란 인생소설을 쓰고 있다. 그럼 이 여인은 누구의 죄 때문에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이 태어났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진실하게 인생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한없이 울기도 하였다.

‘누구의 죄입니까?’ 세상 뉴스를 볼 때마다, 외치게 되는 사건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나? 그럴 때마다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자연의 재해로 인하였다고 하면 하늘에 호소할 명분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이나 저들이나 별다름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

그러나 본문에서 깨 듣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억울한 일인지 모르나 하나님의 일에서는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격하게 되고, 하늘을 바라보며, ‘어찌 이런 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 하나님!’(오 마이 갓!) 하고 외칠 때가 많아졌다. 어릴 적부터 자주 산을 오르며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산을 오르며 하늘을 바라보며 위로를 찾을 때가 종종 있다. 특히 한국의 산은 정말로 복 받은 산들이다.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아닌. ‘산을 벗 삼아 오른다.’는 심정으로 자연의 섭리를 가까이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금수강산」이란 축복된 것임을 일찍이 선인(先人)들에게서 들었던 것에 놀라움과 기쁨이 넘친다. 한국의 산 말고는 어느 나라의 산도 사람이 쉽게 오르고 내릴 수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금치 못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한국의 ‘아리랑’ 노래에 경악을 하며 격찬까지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도 아리랑의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더욱 놀란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의 아들 중에 셈, 에벨의 자손 중에서 욕단은 많은 자손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주로 산악지대였고, 끝없이 동쪽 산으로 이주하여 갔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욕단의 후손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으며, 벨렉의 후손들이 이어져 나오면서, 그 후손 중에 데라가 나오고, 아브라함이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예수가 나온다. 그런데 욕단의 후손들은 산을 넘고 넘어가면서도 하나님(엘)을 노래하며 불렀던 것이다. 그 노래가 끝까지 불러진 것이 ‘아리랑’이란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는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한 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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