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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오늘이

[영화감상하며]

by trustwons

그때와 오늘이

[trustwons최희원] [오전 2:10] https://youtu.be/pi0 aSYjXnu4? si=yWIwT91 CcyhUQBv4


옛 영화, 『구름은 흘러도』을 우연히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다. 영화 제목이 좋아 열었다. 1959년도 영화였다. 영화의 배경은 탄광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하지만 시대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는 어린 시절에 보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눈물 없이는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그때와 너무나 달라졌으니,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친구들, 이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젊은 친구들, 하지만 다시 회상하면서 이토록 소중한 이야기를 오래 보관하고픈 심정이 하늘 같다.

『구름은 흘러도』의 제목에 소제목을 붙인다면, 「눈물은 흘러도」라고 붙여주고 싶었다. 비록 탄광마을에 살지는 못하였지만, 동네에는 연탄공장이 있었다. 친구들이랑 연탄공장에 가서는 산더미 같은 흑연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희귀한 흑돌멩이를 하나씩 집어 들고 집으로 왔던 시절, 그리고 흑돌로 땅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고 놀던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가난이 부끄러운 줄을 몰랐었다. 모두가 가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늘 재미있었고 즐거웠었다. 비록 작은 산이지만, 뒷산에 오르며 들풀을 뜯어먹으며 신나게 산언덕을 뛰고 바위를 오르고 뛰어내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며, 마치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신선처럼 느끼고 했었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는 마냥 즐거워했었다. 때로는 옷을 훌랑 벗어던지고 팬티바람으로 풀밭을 뒹굴며 놀다가 비가 그치면 바위에 젖은 옷들을 펼쳐놓고 바위에 덜렁 누워서는 하늘에 구름들을 쫓던 모습이 선하다.

어느 날, 남자아이들끼리 산으로 놀러 갔다가 쏟아지는 소나기에 옷을 다 벗어서는 비에 젖지 않도록 바위 속에 감추고는 고추 달린 모습으로 풀밭에 뒹굴며 바위 위에 팔자모습으로 누워서 쏟아지는 빗물에 얼마나 통쾌하고 신났는지 모른다. 그때가 그립구나!

『구름은 흘러도』에 아버지를 다 잃고 형제들끼리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모른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며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며, 그때는 그랬지~ 가난하였어도 마음은 늘 풍요로웠다는 것을, 오늘날에는 가난함을 상당히 부끄러워한다. 아니 가난을 증오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었듯이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이나 집안을 이웃들이 많이 도와주었었다. 그래서 어려워도 견뎌낼 수가 있었던 같다. 큰오빠는 탄광에 가고, 언니는 식모로 서울 가고, 작은 오빠는 돈 벌겠다고 서울 갔으나 헐벗은 차림에 불량소년으로 경찰에 잡히고, 그러나 소녀는 고마운 친구에게 줄 선물이 없어 일기장을 선물로 준 것이 출판부에 일하는 친구의 언니가 책을 출판하도록 도와줌으로 인해 소녀는 유명해졌고, 다시 형제들이 모여 살게 된 이야기였다. 참으로 눈물겨운 영화였다.

이런 스토리는 그때에는 흔한 일이었다. 동네마다 어려운 가정은 항상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작정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받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였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할지라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무관심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분명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율법에 무엇이 기록돼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 10:27)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는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신 말씀과 같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여기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함에 뜻을 얼마나 이해할까? 정말로 이해하였다면 실천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땅에는 교회가 많으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음은 왜일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때에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새벽에 뜬금없이 아기울음소리가 동네를 울렸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말한다. “어느 누가 부잣집 대문 앞에 웬 갓난아기를 놓고 갔데!”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열 달을 배에 품고 있던 아기를 남에 집으로 보내려고 했을까? 이른 아침마다 거지들이 깡통을 하나씩 들고는 집집마다 구걸을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집집마다 식사 중에도 대문으로 나와 거지에게 밥과 반찬들을 조금씩 덜어주고 했었다.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추운 겨울에 개천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얼어 죽은 시체가 가마니로 덮어있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개천다리 밑에는 갓난아기를 품은 채로 죽어있는 여인도 보았었다. 또는 추운 날씨에 온 가족이 길가에 나와 덜덜 떨며 구걸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때에는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이 참 많았다. 동네의 야산에는 동굴을 파고 가마니를 덮어 바람을 막고 거기에 가족들이 사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때에는 새해가 되면, 아이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 부잣집 어르신은 세배한 동네아이들에게 맛있는 왕사탕을 하나씩 손에 지워주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났다. 누가 많이 받았나를 서로 비교하며 자랑하며 즐거워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몸도 마음도 참 건강하게 자랐었다.

그때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비록 가난하였어도 즐겁게 자란 아이들, 추억도 많은데, 오늘의 아이들은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항상 아이들의 얼굴에는 심통과 불만과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다. 왜 그럴까? 그래서 한 거지의 말이 생각이 난다.


“부자들은 잃은 것이 많아서 늘 염려하며 살지만, 우리 같은 거지는 잃을 게 없으니 지붕은 없어도 누울 수 있는 것이면 얼마든지 편하게 잘 수 있단다.”

그 거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거지 옆에 같이 누워 보았다. 정말 편안했다. 하늘에 별을 보고 푹신한 풀밭에 누워있으니, 들려오는 벌레소리가 얼마나 정겹게 느꼈는지 모른다. 『구름은 흘러도』에 소녀처럼 비록 가난하였어도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되어 구름이 쌓이면 비를 내리고 나면 맑고 청청한 날씨를 맞이한 듯이 된다는 희망이 있기에 하루하루 가난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때나 지금에도 구름은 흘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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