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 스토리]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서양의 기독교세계에 받아들여져 기독교의 교리와 결부되어 기독교철학과 기독교적인 자연학을 낳게 한 셈인데, 동물의 세계에 관해서 『구약성서』의 맨 처음인 「창세기」의 첫머리에 씌어 있듯이, 천지창조의 즈음하여 식물, 동물, 인간이 이 순서에 따라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며, 더욱이 각각은 「종류에 따라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물의 각각의 종은 각각의 종으로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어느 한 개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각종의 식물과 동물 위에다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것, 신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으로서의 인간이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세계관, 인간관인 동시에 생물학, 분류학의 기초를 이루는 사고방식이다.
다윈은 많은 증거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그것을 저서로 정리하여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1859년의 일이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계에서의 생물은 항상 너무 지나치게 번식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유리한 형질(形質)을 가진 것만이 살아남으며, 그리고 이 유리한 형질을 자손에게 전해 간다. 이리하여 환경에 한층 더 적합한 것이 대대로 선택되어 남겨지고, 환경이 변화하면 그것에 따라 적응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한다고 말한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큰 문제를 던져 주었다. 그중에는 찬성론도 있었고 반대론도 있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특히 거센 반대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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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인간도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한 결과라고 본다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것, 하느님의 특별하신 피조물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을 밑바닥서부터 뒤엎어 놓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은 반대론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학슬리의 『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1863년)와 다윈의 『인간의 유래』(1871년)가 세상에 나오자, 그것들은 반대론의 불길에 기름을 퍼붓는 결과가 되었다. 진화론에 대한 학문적인 찬반양론도 이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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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진화론이 주장하는 바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세계관 및 인간관과는 서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진화론은 『성서』의 기술과 합치하지 않는 점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냐는 심경에 몰리게 되겠지만, 그것은 결국 과학에 대한 이해와 『성서』의 이해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도 우리는 지동설을 둘러싼 『성서』와 과학의 문제에 대한 갈릴레이가 취한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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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 또 하나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진화론이라는 과학이론은 기독교적인 종의 개념과 기독교적인 시간개념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즉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변화하지 않는 종이라는 개념이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그 종이 변화한다는 것을 논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 창조의 날로부터 종말 때까지 일방향적으로만 나아가는 독특한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시간 속에서의 일방향적인 변화 내지 진화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기독교/와다나베 마사오 글/오진곤·손영수 역/전파과학사>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가 있을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직 어떤 형상도 나타나지 않은 때에 창조의 뜻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가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난 하나의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싶었었다. 그것이 바로 『어둠의 사십 년』이란 인생소설인 것이다. 여기에 주인공은 전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여인이다. 인간은 무(無)에서 어떤 생각도 창출해 낼 수 없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 이유를 인류역사에 나타난 인간들의 행각(行覺)을 살펴보기만 해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 이런 말이 있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만 있어도 놀라운 일을 해냈다.” 여기서 1퍼센트의 영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에서 제공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사고세계는 어떤 개념, 이념, 사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지식문명, 근대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발전해 온 것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철학이 공존과 혼합과 융합되어 이루어진 인간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요점은 인간은 집단적, 사회성을 바탕을 두며, 목적론적 존재라는 것과 자연세계는 계층을 이루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철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하여 창조자의 주권과 우주만물의 창조와 통치,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지식문명이 서구유럽으로부터 번성하여 오늘날에 인류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동방세계에서도 지식문명이 있었지만, 사실은 동방의 지식문명에는 솔로몬시대에 동방에 왕들이 솔로몬에게 찾아와 지혜를 배웠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동방의 현자라는 석가의 시대에도, 불교의 배경에도 역시 솔로몬의 지혜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지식문명에 대해서 말함에 있어서 인간의 지식세계는 무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반드시 어떤 영감, 이념, 사상, 개념 등에 따라 그 본질에서 지식이 형성되고 발전하고 진화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이란 놀라운 인간의 사고개념은 무에서 시작된 이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관과 기독교의 철학관에서 진화론의 지식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화’와 ‘진화론’의 개념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다. 따라서 종의 부분적 변화(진화)를 본질적 진화로 인식함으로써 종의 진화라는 엄청난 사고의 틀이 비틀어지면서 다양한 진화론적 사고의 틀, 이념,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기독교적 철학(신학과는 다른 인본주의적 관점을 둔 학문)에서는 종의 창조와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진화론과 환경론도 등장하였으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과 돌연변이 등 다양한 개념들이 인간의 사고의 틀을 고정화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개념과 이념, 사상에서 자유 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을, 성서에는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이 노아의 제단의 향기를 흠향하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이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창 8:21)
또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깨어 있어라. 너희 주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마태 24:42)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위의 두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홍수이전보다 이후에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은 태어나면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태어났으나 인간의 악한 이념에 의해서 악해져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어 있어라”와 “진리를 알라” 함에는 인간세상의 이념과 사상과 개념에 종이 되어 의식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