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한 14:15,16,17)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나리라.』(요한 14:20,21)
『보혜사, 곧 나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Bible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으며, 이를 지키라 하셨다. 그러시며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셨다. 이를 가만히 묵상하면, 예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할 때에 저절로 새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요즘이나 예수님 당시나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지켜 의를 나타내려 하는 짓(의식)과 거룩한 기독교인척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계명(구약시대에는 십계명, 신약시대에는 새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한 자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는 겉모양만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그리스도인 많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겉은 그리스도인 같으나 속은 시커먼 마음들이 가득한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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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계에 흩어져 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데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동일한 분으로 인식되며, 그의 가르침도 똑같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세속적인 풍습과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들의 풍습과 전통에 따라 예수를 믿게 되는 양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러니 하다. 즉, 그들의 문화 속에서 신앙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교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한 귀여운 아이를 보고 말하기를 ‘어쩜 보살처럼 생겼을까?’라는 표현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문화 속에 기독교 신앙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불교문화에 그리스도의 신앙이 더해진 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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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함은 성령이 저들을 도우시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진리의 영이라 함은 성령이 우리 안에 게실 때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알고자 스스로 힘써 노력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려 하지만 결코 진리를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의 그림자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려고 하려면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야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자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셨고, 성령은 이를 알리려고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계셔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는 생활을 행 할 것이다.
<진리를 알라 너희가 자유케 된다/최희원 글/ 정문사>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인간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 이런 질문을 가지게 된 때에는 중학교 삼 학년 시절에 몹시 가난한 생활에서, 인생에 대해 비관하기보다는 무의미함을 느끼게 되어 삶의 가치를 부정하였던 때였다.
그때는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달리 보였다. 하나의 생물들이 돌아다닌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에 나에게 위로를 주는 것 중에 하나는 산과 들에 환경이었다. 나무들과 들풀, 그리고 하늘에 구름들, 이들은 늘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한결같았다. 하지만 길에 돌아다니는 인간들에게는 끝없이 변화하는 바람과 같아 보였다. 쉽게 말하면, 아무 의미 없이 산다고 느껴졌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렇게 깊이는 알지 못하였지만, 방황 끝에 낡은 책들을 접하면서 조금씩 나름대로 ‘개똥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에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불렀다. “어이, 개똥철학자!” 그러면서도 나를 가까이 지내려고 했다.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나를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싫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하지도 않았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당시에는, 정말 나는 초인, 니체가 말하는 그런 초인이 아니라 삶에 대한 초인인 것이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삶이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 자신에게는 놀라운 싹이 트고 있었다. ‘자유의지’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었다. 언제든 내가 원하면 더 살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다는 개똥철학 말이다.
그런 나에게 빛이 보였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지옥을 다녀왔다. 철저하게 지옥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깨어났을 때에는 내 몸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양지바른 곳에서 독서를 하며 몸을 녹이던 나에게 삶의 의미를 던져준 것은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 창조자와 예수였다. 물론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방황하며 다른 진리를 찾으려고 도서관에 박혀 살았다. 그러다 보니 교수와 친구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S대학에 편입하려고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때엔 난 S대학이 대단한 것인 줄 몰랐다. 어디서 공부하든 자신의 할 탓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쓸데없는 비교사상이라는 것을 나의 개똥철학이 말해주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의미이지, 누구랑 비교존재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먼저 할까?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부모 없이 자라는 자녀라 할까? 인생은 딱 한 번뿐이라는 걸, 모든 인간들은 다 안다. 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1퍼센트의 깨달음만 있다면, 진리를 발견하는 길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리에 사람들을 보면, 또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픔은 내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는 첫 번째의 길은 자신에게 철저히 진실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죽음 앞에서 나에게 진실할 수가 있었다. 내가 죽음 앞에 선 것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사춘기 때였고, 한 번은 육십 대 후반이었다. 지금도 결코 잊지 않는다. 항상 묵상할 때마다 생각한다. 그때를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지 않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이었다. 이 말씀이 성경을 다시 보게 하셨다. 성경을 사실(fact-실제로 일어난 것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세상이 투명하게 보였다. 진실과 거짓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전하려는 것이다. 세상은 창조되었고, 창조자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이 세상을 사랑의 힘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그리고 등진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심을, 그래서 예수(하나님의 사랑의 증인)를 이 땅에 보내고 어둠에 있는 인간에게 빛을 보게 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떻게 살든 자유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인생을 통해서 더욱 심오하게 깨닫는 것이다.
히틀러 정권 때에,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개돼지처럼 죽어갈 때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를 「죽음의 수용소」를 쓴 분의 고백에서 깨달았다. 어째서 죽음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을까? 그분의 고백에서는, 유대인들은 자신이 여호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창조주를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 오늘날에 사람들이여!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기를 바란다. 베드로의 말대로 ‘인생은 나그네’ 일뿐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들은 날마다 매일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진리를 알게 하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신학자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니요, 전통이나 문화도 아니다. 오직 보혜사(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를 예수님인 자신의 이름으로 보낸다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왜? 진리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일까?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세상을 사랑하는 분이 계시고, 그분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 즉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 아니라는 것, 인생은 나를 점검하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 나그네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진리를 모를 때에 인생은 허무할 뿐이지만, 진리를 알 때는 인생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