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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내가 주를 보았다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32, 내가 주를 보았다


『그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얘기 보니,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마리아가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한 천사는 머리맡에 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천사에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예수께서 거기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요한 20:11~14)

『예수께서 마리아에게,“마리아야!” 하시자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랍오니!” 하고 말했다.(이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곡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말하여라.』(요한 20:16)

----------- Bible -----------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와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려 했던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그 외의 여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나온다. 이는 저자 요한이 복수보다는 단수 인물로 나타냄으로써 이야기의 핵심을 강조하였다고 보인다. 마리아는 무덤을 막은 돌문을 어떻게 열지 염려했는데, 아 보았을 때에는 이미 돌문이 열려 있었다. 이에 놀란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놀라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고한다.

----------- 생략 -----------


이들 제자가 돌아가고 난 후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애절한 심정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마리아는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였는지를 엿볼 수가 있겠다. 그러한 마리아에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자, 마리아는 천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입니다.” 말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아는 뒤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인 줄 모르고 단지 등산지기인 줄로 생각하여,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여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말했다. 어찌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대담성을 보였을까?......... 그때에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시므로 마리아는 반사적으로, “랍오니여!” 하고 대답을 하였다. 헬라어 시대에 마리아가 히브리어로 말했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이었으면 정중하고 신실하게 대답을 하였겠는가? 그리고는 예수님을 만지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말씀하셨고, 마리아는 급히 제자들에게 돌아가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하였다.

<진리를 알라 너희가 자유케 된다/최희원 글/ 정문사>



「내가 주를 보았다.」[I have seen the LORD]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떠나간 후에 홀로 남아서 울며 무덤 안을 보았을 때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던 곳에 두 천사가 있었고, 마리아의 뒤편에는 예수님이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무덤만 확인하고 갔지만, 마리아는 무덤 안에 두 천사가 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뒤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천사와도 대화를 했으며, 예수님과도 대화를 하였다. 이런 확신에 찬 마리아의 고백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여 있었던 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상처를 보여주셨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알았기에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 없었던 도마는 8일 후에 다시 예수님이 같은 곳에 나타나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 보아라고 했다. 물론 도마는 만지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야 믿게 되었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본 것과 도마가 본 것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와 도마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수님에 대한 열정(믿음)과 기대(신뢰)에 대한 차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마리아도 예수님을 본 순간에 직접 만지려고 했다. 도마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고, 직접 그 상처를 만져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


그때서야 도마는 고백을 했다.


“내 주이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


도마의 고백도 놀랍다. 그냥 부활한 예수님을 본 고백을 넘어 그를 주님이시라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추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다른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말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환상이나 귀신처럼 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신을 지닌 채 완전히 사람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있지 않는 오늘날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다. 왜 복이 있다고 했을까? 성령이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함같이 그 후에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스스로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된 자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며, 신실한 인생을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들은 우둔하여 형상을 눈으로 보아야만이 확신을 하게 된다. 서양문화 속에도 이러한 육안으로 보아야만이 학문의 가치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도마적인 개념」 안에서 발전하여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마적인 개념으로 현대문명은 발전해 온 것이다. 인간사회나 경제, 교육, 학문, 종교까지도 눈으로 보고 검증이 되는, 시각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도마적인 개념에 바탕을 둔 발전이었던 것이다. 점점 인간의 문명은 고도의 기술발전으로 미디어시대에 들어섰고, 영상과 현실과 가상의 세계로 다양한 문화를 창출해 내면서 우둔한 인간들에게 보는 것으로 믿어지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주과학이나 양자물리학에서는 가상실험이나 가상현상을 통해 사고인식이 굳혀가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인간이 현명한 것처럼 문명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더욱 인간은 보아야 믿는 인식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서 멀어져 갈 뿐, 반면에 오감(五感)에만 크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인공지능(AI)에 크게 기대하면서 인간에 가까운 인조인간을 생각하게 되고, 의존하려고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의 일부분을 살펴보면, 현대문명화의 지식에서 인간관계에서는 매우 힘들어지게 되면서 인간관계의 기피현상으로써 동물(개, 고양이 등등)과의 관계를 갖는 인간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불편하게 느끼는, 즉 관리적 부담을 느끼는 인간들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도마적인 개념의 현상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가로막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이르면 들어도 깨닫지 아니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때가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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