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 스토리]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계시와 신앙의 하나님과 조화되는 이러한 지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자연신학” 혹은 “자연의 신학”의 과제였다.
17세기의 소위 “물리-신학”(Physiko-Theologie)은 새로운 자연과학의 영역들 속에서 이러한 지혜를 획득하고자 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672년에야 출판되었던 그 당시 유명한 존 레이(John Ray)의 책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창조의 사역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 Manifested in the Works of Creation)
우리가 지혜를 찾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며 또 그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물질의 구조와 유기체적인 것의 단계들 속에서 숨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생명에 도움이 되는 분자의 결합과 세포의 유기체들이 생성되는 반면, 생명에 해가 되는 것들은 배제되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또 직선적으로 “진화”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생동하는 것의 복합적 학습과정이다. 생물들이 본래 타고난 코드는 생명의 능력이 있으며 창조적이다. 물질과 생명의 건축물 속에는 아주 오래된 기억(Gedächtnis)이 저장되어 있고, 이 기억은 지혜라 불릴 수 있다.
인간이라 불리는 종은 땅이라는 푸른 행성 위에 아주 늦게야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과 그것의 생태 체계의 지혜에 따라 연구하고 이리하여 자신의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연과학적 관찰들과 실험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 내재하는 지혜로부터 배우기 위해서이다.
<과학과 지혜/위르겐 몰트만 지음/김균진 옮김/대한기독교서회>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은 얼마나 자연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아니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자연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인간인 것을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생각할 줄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태생(胎生)이나 유생(幼生)에서 나약하거나 비굴하게 성장한 인간은 자존의식(自存意識)에 불안이 지배를 받았거나 두려움을 일찍 습득한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은 스스로 생각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건강한 환경에서 자란 인간들은 보고 듣는 것에 매우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병든 환경, 비틀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자존의식보다 먼저 두려움에 대한 의식을 먼저 하게 된다. 물론 성장과정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오는 인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더욱 포악하고 부정적 사고에 갇혀 있는 인간들도 많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가장 좋은 치유법은 무조건적인 사랑뿐이 없다. 누가 이러한 사랑을 해줄 수 있겠는가? 초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전하며, 병든 자나 불구한 자나 귀신 들린 자나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는 친히 행하여 보여주면서까지, 인간의 회복을 위해 자신까지 내놓으면서 십자가에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희생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일부, 아주 적은, ‘모성애(母性愛)’에서 찾을 수가 있겠다.
놀라운 것은, 어떤 여성이든 임신을 하게 되면 성품이 매우 선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공포나 불안을 남자에게서 느낄 때는 그 선한 성품을 사라지고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여성도 하늘이 준 이 선한 성품으로 새 생명을 낳고 키울 것이다. 이런 심오함은 창조주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인 셈이다. 오늘날에 인류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여성의 성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여성에 대한 학대가 고대나 현재에도 일부 국가에서 내놓고 악행을 전통과 종교로 고집하면서 여성과 아이들에게 온갖 악행을 그들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세계는 남성주의와 인본주의에 그런 이념과 전통으로 구축하여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 악은 절대로 스스로 선해질 수가 없고, 덜 악해질 수도 없으며, 점점 ‘악의 진화’를 인간문명의 키(key)로써 더욱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 인간현실인 것이다.
이미 이러한 인간의 현상을 창조자 하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예들 속에서 에노스(Enosh-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이름으로써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셨으며, 이어서 타락한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어가셨던 것이다. 이것이 곧 진리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이미 하나님은 자신의 흔적을. 섭리를, 의지를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로써 ‘자연신학’, ‘물리-신학’이라는 것에서 자연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음과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지식을 인간에게서 형성되고 이어져왔고, 가르치고, 배우고, 전해져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지혜조차도 사악한 인간들은 왜곡시키면서 진리 아닌 진리처럼 악한 길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조금만 진실한 눈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자연의 놀라운 지혜들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자연의 지혜는 단순이 물질에 대해서나, 생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의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기 전인 시대에도 선한 사람들이 존재해 있었다. 그들은 무엇으로 그런 선한 마음을 지킬 수가 있었겠는가?
그 예를 하나 든다면, 예수가 탄생할 즈음에 동방의 박사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옛날에는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동서(東西)에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 그들은 때론 점쟁이 일도 했을 것이며, 나라의 운명을 점치는 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늘에 별들로, “하늘의 공간에 빛들이 생겨 낮과 밤을 나누고, 절기들과 날짜들과 연도를 나타내는 표시가 되게 하라.”(창세기 1:14)의 뜻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편 땅 위에 뭇 생물들에게서 인간의 식물과 병을 고치게 하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기에 한의학이란 것과 서양의술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는 철학이나 자연의 원리를 발견한 과학들이 인간세계에 얼마나 나침판 같은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때론 인간의 악함과 인간의 권력(영웅 니므롯 같은 인간)이 인간중심에 자리를 잡고서 그릇된 이념과 사상으로 지혜들을 왜곡케 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파괴하거나 자유와 의지를 빼앗는 짓들을 해온 것이 인간세상이 아니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의 악의 세계 속에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아니하고 때론 자연재해로, 때론 비극과 참사로, 때론 정의로써 인간세계를 수정, 교정하시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 민족을 인간 세상에 세워두시면서 진리의 등대역할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지혜는 여전히 창조자를 보여주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도 섭리를, 원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진실한 신학자나, 진실한 과학자나, 진실한 지식인들은 그 자연의 지혜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충고>
1. 인류사에서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과 아이들에게 학대와 제물로 삼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2. 성경에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으나 여성에 대해서는 거의 적은 이유는 뭘까? 그 예를 찾으면, 노아홍수 이전에 인간세계를 보면, 하늘의 아들들이 땅에 내려와 여자를 취함에 대해 남성들은 매우 열등감과 시기심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남성들은 여자로 음란문화를 이끌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결국 물로 심판을 했다.
3. 인간의 인위적 진화로써, 남성이 여성화의 젠더(gender) 현상의 목적은 여성파괴에 있는 것이다. 마치 늑대가 양탈을 쓴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여성이 남성화의 젠더현상은 남성에 대한 두려움의 심리현상인 것이라 생각한다. 이 또한 창조자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