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 스토리]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공동번역 개정판 성경)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표준 새 번역 개정판 성경)
이 구절에 의하면, 창조가 이루어질 무렵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으며,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었다. 빛과 어두움에 혼합된 채로 있었고, 천지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나누이기 전의 혼돈 상태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초의 혼돈 상황은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가 아직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로 혼합되어 있는 뒤죽박죽의 상황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창조 사역이 혼돈(formless)과 무질서(chaos)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질서 있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cosmos)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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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 2절이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던 당시의 혼돈 상황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실제로 3절 이하에 본격화되는 하나님의 창조는 엿새 동안 매우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첫째 날에 있었던 빛의 창조와 밤낮의 분리(3~5절), 그리고 둘째 날이었던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의 분리(6~8절)는 1장 2절에 묘사되어 있는 혼돈 세력의 구축과 통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날들의 서술도 거의 비슷하게 하나님의 창조가 혼돈 제거와 질서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셋째 날에 이루어진 마른땅(뭍)과 바다의 분리, 각종의 식물의 창조(9~13절), 넷째 날의 천체의 창조(14~19절), 다섯째 날의 어류와 조류 창조(20~23절),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 이루어진 각종 짐승들과 인간의 창조(24~31)등이 그렇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잘 짜인 대칭구조를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엿새 동안의 창조과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와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가 대칭관계에 있음이 금방 드러난다.
이를테면, 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 만들어진 것들은 주로 어떤 본질 내지 생활공간과 관련된 것들이고,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만들어진 것들은 주로 그러한 본질로부터 파생한 것들이거나 또는 특정 공간에 거주하는 생물들을 지칭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핀다면, 첫째 날과 넷째 날이 대칭관계에 있고, 둘째 날과 다섯째 날, 그리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서의 창조기사와 한국의 창세신화/강성열 지음/프리칭 아카데미>
먼저 이것을 아는가?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언어를 가진 피조물은 오직 사람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언어를 가진 존재라는 것은 대화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의 상대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자가 아닐까?
그런데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명령을 하였다는 것이다.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는 피조물일지라도 그 말씀(언어)에 순응하여 나타났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창조된 이후 오늘날까지도 말이다. 사람만 제외한 모든 피조세계는 그 말씀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을 자주 오르내리며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욱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자연의 모든 것은 인간을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기에 나는 산을, 자연을 매우 좋아한다. 하물며 뱀, 도마뱀, 박쥐, 부엉이, 나방, 무당개구리, 벌, 파리, 모기 등등 모든 자연의 생물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창조자의 말씀에 순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인간은 달랐다. 유일하게 창조자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려고 하지 않는 면이 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창조했을까? 이해하는 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인생의 끝에 왔을 때에서야 아주 조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인간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어떻든 언어를 가진 인간은 언어를 바탕으로 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인류문명을 이루어갔던 것이다. 세상이 생겨난 것에 대한 이야기, 설화, 전설 등등에서는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지능로봇처럼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내용에 따라 언어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 인간문명이 그렇다. 갓 태어난 갓난아기 때부터, 어머니의 젖을 빠는 때부터 인간의 문명은 인본주의 사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 사상과 문명을 바탕으로 갓난아기는 언어를 표현할 수가 있고 그렇게 자라 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언을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홍수 이전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악하다 하지 아니하셨다. 단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사람의 악함이 어려서부터라고 말했다. 만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한다면, 그 악함은 누구에게 핑계를 될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는 모든 갓난아기들은 죄가 없는 것이라고 해야 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죄를 갖고 태어났다면, 하나님은 선하심도 의로우심도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원죄?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의 원죄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은 없다. 단지 신학적인 이념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다. 예수께서 말했듯이 본인의 죄가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했다. 모든 아기들은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한 여성에게 부여된 잉태의 특권은 축복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한 여인 한나에게 잉태를 허락하셨으며, 한나는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했다. 태어난 사무엘(Samuel)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는 ‘슈무엘’ 즉 셈(이름)과 엘(하나님의 신)이 합쳐진 형태로, ‘하나님의 이름은 엘’, ‘그의 이름은 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위대한 존재가 여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세상에는 남자들의 세상으로써, 끝없이 여자를 괴롭혀왔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첫 번째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갓난아기이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에 희생된 수많은 아기들이 그런 이유인 것이다. 다음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괴롭히는 것이 곧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음미해 보면, 모태에서부터 죄를 지은 자란 기록이 없으나, 모태에서부터 택하신 것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이사야 44:2)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편 58:3)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71:6)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한 9:1~3)
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런 서두의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인간의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언어가 있고 글이 있기에 모세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진리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인간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고 만다. 위의 저자의 글에서도 저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한 안목은 진실한 영혼 이어야만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모세의 기록한 천지창조에 대해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유한적 범주의 사고에 준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기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해서 기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게시였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있어서 혼돈에서 질서로, 어둠에서 빛으로, 무에서 유로 실존케 하신 과정을 인간의 유한적 이성으로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특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붙이셨다.
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에는 온전함과 선함과 공의로움 그리고 조화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의 과정에서도 훗날에 인간의 이성으로 깨닫게 될 수 있도록 질서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피조물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될 수 있음은 피조물들의 독립성과 대칭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칭구조라고 표현을 하였지만, 오해하기 쉽기 때문에 대칭성 관계라고 함이 옳을 것 같다.
* 대칭구조란, 서로가 일치될 수 있는 조건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칭성의 관계란 일치는 아니지만 관계성과 공존성을 이루는 데에 균형이라고 할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