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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근신하라, 깨어라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60. 근신하라, 깨어라 [Be sober, be vigilant]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베드로전서 5: 8,9,10)

~~~~~~~~~~~~~~~ Bible ~~~~~~~~~~~~~


하나님은 결단코 자신이 창조한 것의 일부라도 불필요하게 창조하신 것이 없으시다. 특히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자 하셨던 것을 타락하였다고 그 형상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그 형상을 벗어던지거나 외면한 것이다. 여전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 16)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히셨다.

여기서 세상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말함이다. 인간만을 꼭 집어 말하신 것이 아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과 인간들이 만들어간 세상들 - 문화, 사회, 역사 모든 것을 통틀어서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 역사와 문화에 관여하고 계심을 말한다.

때로는 악이 선을 이기는 듯하지만, 결코 악이 승리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죽음으로 몰아간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듯이 말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8절)고 말이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시지 않는 세상이라면 근신하고 깨어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당장에 철폐하고 파괴하도록 전투적인 싸움으로 끝없이 했을 것이다. 과거의 중세시대에 십자군 전쟁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서 얼마나 선한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던가? 종교적 권력을 가진 자들이 더 잔인하게 정의를 부르짖으며, 의를 외치며, 무차별하게, 무자비하게 살상을 저질러 왔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방법으로 선을 이룩하시지 않는다. 의로움은 선한 곳에서 나오고, 선한 것은 진실한 곳에서 나온다. 따라서 참 믿음은 진실한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베드로전후서 묵상말씀/ 최희원 글>



야간에 초소에서 군인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은, 그냥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훈련된 지식에 의해서 야경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의식을 가지고 서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근신하고 깨어있는 자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는 근신 하라, 깨어라 고 말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후미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이다. 이는 마치 야간에 경비를 서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마귀는 성경적으로 사탄을 말하고 있다.

예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갔다. 이는 예수로 사탄의 시험을 받게 하려 함이 아니다. 그에게 곧 닥칠 사탄의 시험을 준비케 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을 전력을 다하여, 즉 근신하고 깨어 있었던 것이다. 식음(食飮)을 멀리하고 금식하시며 기도에 전력을 다 하였던 것이다. 역시 사탄은 예고 없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에게 인간의 본능인 굶주림과 권력욕과 우상숭배로써 시험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근신하며 깨어있었기에 예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예수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직후에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에게 임하심을 보았으며, 하늘로써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이 임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며 믿음을 자랑하고, 성령체험을 자랑할 때가 아닌 것이다. 곧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령이 임하심을 보았다면, 성령이 이끄는 대로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성령을 가장하고 접근하였다면, 남을 비교하며 스스로 믿음을, 성령체험을 자랑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다급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는 찾는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외쳤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근신하고 깨어있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유대의 두루마리 말씀을 공부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세례를 받고 곧장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고 나서 천사들이 그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는 곧바로 갈릴리로 가서 그 주변에서 세례요한처럼 자신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중에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에도 동일한 복음을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날마다 기도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신학자들은 모른다. 오히려 중세시대에 유대인을 구별하고자 만든 사도신경에 더욱 의미를 주고 있다. 사도신경은 어떻게 믿는지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는 것일 뿐이지,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와는 먼 의미를 줄 뿐이다.

참말로, 근신하고 깨어있는 자라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기도문을 날마다 묵상하며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한 믿음으로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다. 주님의 기도문만 잊지 않고 묵상하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근신하며 깨어있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는 놀라움을 알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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