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思考]
먼저 철학적 의미로써 양심이란? 인간이 사회에서 자신의 언행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심은 인간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써, 매우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매우 인본주의적인, 즉 인간적인 의미가 깊다.
그럼 양심에 대한 언어적 이해를 살펴본다면, ‘양심이 없다.’와 ‘뻔뻔하다.’를 혼용해서 이해를 하고 있는 편이 많다. 또는 선량한 마음이나 착한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양심적이다.’ 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양심을 믿어!’ 등등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양심’(良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다. 이해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인식하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된다. 즉 사전적 이해로써, 사물의 가치를 변별(辨別)하거나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으로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게 하는 도덕적인 의식이라고 한다.
양심(conscience)에 대한 영문으로서 유래는, 고대 그리스어로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나 라틴어로 「conscientia」는 어원적으로 ‘함께 앎’이란 뜻으로써, 서로 공감되는, 또는 인식되는 마음이란 의미인 것이다.
헌법적으로는 ‘양심의 자유’에서 법률적인 의미로써, 사상과 신념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헌법재판소에서의 정의로는,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도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하고 있다.(‘96 헌가 11)
그러나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에 있어서는 ‘양심의 자유’의 기원이 종교개혁 시기에 주창된 ‘종교의 자유’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즉 최초로 종교의 자유가 인식되면서, 양심의 자유도 따라서 인식되었다고 보아진다. 그전에는 개인, 양심, 자유, 이러한 신성언어는 거의 가려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 성경에서는 양심에 대해 어떤 표현을 하고 있을까? 구약성경에는 양심에 대한 단어가 없다. 즉 히브리어로써는 양심이란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세계관, 즉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중심의 세계관이어서, 옳고 그름의 기준, 하나님의 율법으로써 판단할 뿐이며, 개인의 생각이나 인식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의 신앙관, 세계관에 의해 맥을 찾아볼 수가 있을 뿐이다. 양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었거나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신학자들에 의해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심은 인간의 자기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해석하고 있다.(행 23:1, 24:16), (고전 4:4) - 바울은 자신의 언행을 점검하여 그것이 자신의 도덕과 가치체계에 합당한 지를 살핌이라고, 즉 그의 도덕적인 가치체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둔다고 한다.
둘째, 양심이 어떤 것을 증언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졌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양심을 가졌다고 한다.(롬 2:14-15) 또는 자신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롬 9:1)이 그리고 사람들을 다룰 때에 거룩함과 신실함으로 행했다는 것(고전 1:12)을, 또는 바울은 양심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고후 5:11)고 한다.
셋째, 양심은 자신의 가치체계의 종이라는 것이다. 미숙하고 나약한 가치체계는 나약한 양심을 낳고, 제대로 알고 있는 가치체계는 옳고 그름에 대해 확고한 인식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심에 대한 정리에서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결국은 신약성경에서도 직접적인 양심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단지, 언어학이나 인문학에 근거하여 해석을 찾아보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한다면, ‘양심’이란 인간이 창조해 낸 용어인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즉 사고능력을 지닌 인간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되는 심리적 반응에 대해서 표현한 하나의 용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는 반응에 대해서 “너도 그렇지? 나도 그래!” 이런 반응이나, 연약한 아이를 무참하게 때리는 것을 보면, 분노하고 괴로움 반응에 대해서도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 이러한 반응들이 모여서 민심(民心)을 일으키게 되고, 타당성과 합리화를 갖도록 함으로써 양심반응을 위한 행동을 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란 용어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며, 허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양심에는 기준이 없다. 정의가 없다. 즉 양심, 민심을 만들어내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양심에도 다양한 사상과 이념에 따라 행동을 반응하게 이끌어낸다. 즉 종교전쟁에서도 그렇고, 이념전쟁이나 종교재판, 인민재판이나 공개재판, 그리고 봉건제도나 노예제도 등이 다 그런 양심반응에 따라서 죄의식을 갖지 않고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었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거룩함이나 신실함은 인간의 양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양심으로 진리를 깨닫거나 하나님을 알게 될 수 있다는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민족들에게는 양심이란 허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적인, 즉 인본주의적인 옳고 그름을 저울질 하는 양심을 생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진리, 하나님의 율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이란 용어는 인간들의 인본주의적 이념에서 생산된 통치적 수단일 뿐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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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문헌: 양심이란 무엇인가요? www. got question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