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베드로후서 1: 1,2)
~~~~~~~~~~~~~~ Bible ~~~~~~~~~~~~~
베드로(반석의 뜻)의 신앙이란 앞서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것이다.
결국은 로마교회는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 위에 세우지 않았다. 반대로 예수를 핍박하다가 회개한 자의 신앙 위에 교회를 세웠다. 사울은 한 번도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신앙은 그가 교육을 받았던 지식과 바리새파의 율법에 바탕을 둔 신앙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주석을 달고 하면서 폭넓게 복음적 지식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깊고 해박한 복음 해석은 놀라웠다. 바울의 이러한 신앙적 지식은 오늘날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학문이 되었다.
그런데 본문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자신을 밝혔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함은 사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종이라고 하는 말과 일치함을 볼 수 있다. 고기를 잡던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시대로 하여 고기를 가득 잡고는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누가 5:8)라고 고백을 했던 사람이다. 그 외에도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도라 말했다. 이는 당연히 예수를 따라다녔던 제자였고, 가장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특권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절)이라고 말함은 그의 신앙이 얼마나 깊고 넓다는 것을 단면으로 엿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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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다 그러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했고,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특권을 예수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세우지 않았으며, 그들을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실을 전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바울처럼 가르치려고 했더라면 많은 파(派)가 생겨났을 것이다.
베드로 당이니, 요한 당이니 하며 세력다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에 대해서는 바울 당이니, 바나바 당이니 하는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사람이 사람을 높이 세우면 자연히 당(黨)을 짓거나 세력(勢力)을 만들게 마련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 묵상으로 읽는 베드로전후서 말씀 / 최희원 글>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에 성급히 나서서 말한 시몬에게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의 이름이 베드로라 함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게 고백한 자에게 ‘베드로’의 이름을 주신 것이다. 시몬은 예수님이 그렇게 정해주심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기에, 그 후에 시몬의 이름을 버리고 베드로의 이름으로 살아간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시몬을 베드로라 불렀던 것이다.
그 후에도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지만, 그는 예수님이 불러준 베드로의 이름까지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죽은 날까지 베드로의 이름을 살아간 것이었다. 그런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베드로라 칭함을 받은 자인데,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저들에게 어떻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는 자라고 말하였을까? 이는 그리스도인이란 언어 속에는 평등과 자유가 보장된 것임을 볼 수가 있겠다. 즉 믿음에 선후(先後)가 없으며, 상하(上下)가 없으며, 대소(大小)가 없는 것이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직함보다 더 좋은 직함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곳에서는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있는데도 다른 직함의 이름으로 서로 호칭하고 부른다. 마치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조선시대에는 천민이 아닌 분들, 귀하신 분들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직함으로나 신분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부모의 존함도 잘 모르고, 상사의 성함도 모르고, 스승의 이름도 모르는 희귀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존함을 부를 때가 있다. 그가 부모이든, 상사이든, 통치자이든 말이다. 어떤 때일까? 그것은 어떤 관계적인 인식을 깨우치기 위함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를 깨우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자식이 아버지의 존함을 불렀을 때에는 부자(父子) 관계가 아닌 인간(人間) 관계로서, 재인식하고자 함이거나 존재의 근본을 돌아보자는, 어떤 조건이나 여건을 떠나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해줄 때에 나는 매우 놀랐다. 그들은 창조자의 창조의 본질을 외면하지 않는구나 하고 말이다.
사상과 이념으로 만들어진 전통과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 수가 있을까? 이에 딱 맞는 예수님의 천국비유의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비유이다.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않다 하시며 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자마다 데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찾아온 손님들을 들러본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말했다. “친구여, 너는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느냐?” 하시며 하인들에게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움에 내던지라고 했다.
이처럼 어찌어찌해서 예수를 믿었을지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지 않는 자라면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많을 지어다.”라고 말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도 알지 못하면서 유행처럼 따라가는 믿음이거나, 거짓무리에 속한 자 들이거나 그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인 행세를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 자들은 편한 신앙생활을 좋아한다. 성경을 읽기보다는 설교를 듣기를 즐겨하고, 말씀을 깊이 알고자 하기보다는 누군가가 해설해 주는 걸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니 그들은 속 빈 쭉정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