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思考]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한국의 7,80년대에는 이 말이 참으로 유명했었다. 르네 데카르트 철학자의 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어떤 분 인지도 모르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면 화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 말은 명제가 되었다. 역시 데카르트도 이 한 마디로 인해 철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을까? 그 당시에는 역시 나로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는 척 떠들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못하는 뭇 생물들에게는 무엇이 되는 걸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었다. 생각할 줄 아는 인간만이 존재의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다른 생물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무생물들도 역시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산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산을 오르고 할 때마다 늘 거기에 있는 자연들에게서 환희와 평안을 누리곤 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동네의 공원을 홀로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풀과 나무들 그리고 새들로 얼마나 내 마음이 즐거운지 모른다. 아직 곳곳에 눈이 쌓여있지만, 대부분은 눈이 녹아내려 풀들이 더욱 푸르게 보였다. 지름길로 가려고 쌓인 눈덩이를 넘어가다가 신발이 다 젖어버렸지만, 내 마음은 즐거웠다.
그러면서 눈덩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면서 눈보다 녹은 물이 더 무거우니깐 눈덩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거겠지....... 그러면서 잠시 눈에 대하여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만일 눈이 위에서부터 녹아내린다면 어떨까? 그러면 밑에 있는 눈은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말 거야. 이처럼 자연에는 모든 것,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고 있는 거야. 그러므로 자연은 아름답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 신비한 일이 아닐까?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생명은 극적인 현상, 즉 번개로 인해 탄생된 매우 작은 생명체, 아메바, 단세포 생물, 같은 것이 생겨나서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스토리에도 너무나 신비스럽지 않은가? 어떻게 그렇게 짜임새처럼 진화를 할 수 있는지도, 또는 의지적인 진화로 볼 수밖에 없는 놀라움 변화, 진화, 그것도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만 진화를 할 수 있는지도 놀랍지 않은가? 거기에다 인간만 유일하게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생각의 능력을 가졌다는 인간들이 그런 놀라움에 별 반응이 없고,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다. 또한 그것도 신비한 일인 듯하다. 왜?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그 생각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할까?
여기에서 나는 나의 생각으로 자사고(自思考)를 해본다. 생각이란 도구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인류가 오늘에 놀랍도록 문명이,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아무 뜻 없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쓸모가 없는 도구인가? 손발도 제구실을 다 하고 있는데, 세상을 좌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인간의 생각이 명확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생각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누구에 의해, 또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의존해서 활동한다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에 말씀(spirit)으로만 하지 않고 손수 흙을 빚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창조자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피조물인 인간과 대화를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인간들이 말하는 로봇을 만들 때에 말할 수 있도록 정보와 자료를 입력하여 놓는다. 그러나 대화할 수 있는 인간에게는 정보나 자료를 입력해 놓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증거가 갓 태어난 아기는 정보나 자료를 입력되어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기는 듣고 말하는 것을 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곧 아기는 환경 속에서 듣고 보고 하면서 대화의 능력을 스스로 익혀간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을 성경에서는 창조자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화에 있어서는 창조자와 인간은 대등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즉 나는 창조자고 넌 피조물이니 무조건 복종하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인간들은 반드시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하관계를 따지고 각인(刻印) 시키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언어가 유일하게도 세종대왕에 의해 창작된 한국 언어이다. 한국어에는 항상 상하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높임 언어와 낯임 언어가 존재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작할 때의 목적이 글을 모르는 천민에 대해 전달사항에 있어서 불편함을 느껴서 천민에게 맞는 글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인간은 언어가 있었고, 후에 글자가 만들어졌다. 그 언어와 글자로 인해 인간의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각하는 방법을 익혀갔던 것이다. 그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 인간의 관념이 달라지고 삶에 의미도 결정되는 것이다.
그 생각의 방법에 대해 논해보자. 첫째는 대칭적인 인식이다. 둘째는 대칭성의 이해이다. 그럼 대칭적 인식은 무엇인가? 색종이를 반을 접었을 때에 일치되는 관념을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이 일치되면 쉽게 공감을 하고 한편이 된다는 것이다. 유행이란 것도 일치성을 쫓는 행동인 것이다. ‘너의 입장과 나의 입장이 같네?’ 그러면 친구도 되고 동지도 되고 이웃도 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차이가 생겨서 일치하지 않으면 경계하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적대감을 갖는 것이다. 외모만이 아니라 생각도 대칭적인 인식으로 인간관계를 가진다. 사상과 이념도 대칭적인 인식으로 판단한다. 하물며 종교적인 신앙심도 대칭적인 인식으로 믿는다.
이러한 대칭적인 인식은 옳고 그름에 분별이 아니라, 일치이냐 불일치냐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들이 인간세계에 지배적이다. 인종차별도 그렇고, 학벌관계도 그렇고, 문화차이도 그렇고, 지역관계도 그렇고, 등등 상당히 많은 이러한 대칭적인 인식 때문에 국제사회나 인간사회에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대칭적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 가치를 왜곡케 하고, 창조자의 뜻을 일그러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칭성의 이해는 올바른 생각을 가지도록 한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하고, 유지하도록 해준다. 그러면 대칭성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해에서 온다. 자연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생물에도 다양하고 무생물에도 다양해도, 서로 다름에도 상호관계로 조화와 균형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의 대칭성은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전혀 이질적이지도 않으며, 훨씬 조화를 이루며 공존과 공생을 통해 유지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대칭성을 이해하는 태도로써 생각하고 인식할 때에 서로의 존재적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얼굴이 서로 다름에 가치를 깨달으면 굳이 성형수술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흔히들, 개성 있다고 말들 하는데, 좀 천박한 표현인 듯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서로 다름을 통하여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악한 인간은 일치단결에 초점을 두고는 불일치한 자를 숙청하고 죽이는 짓을 하고 있다. 즉 공산당과 사회주의가 그런 일치성과 제도화로 인간을 이념과 시상으로 대칭적 인식을 갖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민주와 자본주의에는 개인의 자유와 평화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곧 대칭성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때문에 자본국가나 민주국가는 눈부시게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칭성의 이해는 창조자의 뜻에 있는 것이다. 천지에 각 종류대로 생물과 무생물을 창조하였다. 특히 인간의 창조에서도 인체의 모든 면에서도 대칭성을 이루며, 인간의 생각의 방법에 있어서도 대칭성의 이해를 하도록 창조하였다.
세상을 보아라! 자연을 보아라! 하나도 일치됨이 없고 대칭성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과 생존하고 있는가? 이러한 대칭성을 이해할 때에 창조자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진리를 알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