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도 찡찡대고 싶어요] 공기로 흩어질 말
사이다? 나도 원해
막장 드라마나 재미있는 웹툰이었으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원한 사이다를 선사했겠지만 수분마저 없는 뻑뻑한 고구마를 나 자신에게 선사했다. 사실 이런 선택을 했다고 해도 그 당시에는 내가 내게 내린 선택의 후폭풍을 전혀 예견할 수 없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안정적인 직업군이라 말하는 회사의 조건에 반대하는 내 의사를 강하게 밀어붙일 단 하나의 확신도 없었고 그 경계에서 고민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업무로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더라."
업무로 바빴던 것은 사실이고 덤으로 정신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다.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했지만 떼쓰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단순한 생각의 결과가 돈을 버는 것을 충족시키기는 했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할 만큼 서서히 정신과 육체를 메마르게 했다. 하지만 그때는 하나의 선택에 펼쳐질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흐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했다. 독서실의 소음보다도 더 적막감이 흐르는 곳에서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띵'
누른 층수의 문이 열렸다. 재계약 날이었다.
상황을 보니 다른 누군가가 계약 중이었어서 반대편에 큰 창으로 가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산과 건물들이 보이고 자동차가 느리게 움직였다. 풍경이 주는 고요함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것도 잠시 내 순서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자 좌측에서 우측으로 번갈아 가며 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번뇌에 빠졌다. 햇빛이 들지 않는 시간이어서 좀 추워서 그런 걸까. 초조함도 몰려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풍경을 뒤로하고 문으로 들어갔다. 계약서를 설명해주는 분의 얼굴과 종이를 번갈아 가며 대답도 잘하고 계약도 마쳤다. 밖을 나가니 함께 올라왔던 선생님이 나를 기다려주고 계셨다. 선생님이 미리 잡아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일터로 내려갔다.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서서 엘리베이터의 모서리만 응시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공기가 엘리베이터 가득 에워쌌다. 그러다 말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서류처리가 안된 지금이라도 무르면 무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아, 종이에 잉크가 마르지 않아서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법 가능한 말이었다. 계약서 처리 절차가 중간에 끼여있으니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면 할 수도 있었다. 웃긴 말을 주고받다 서로 걸음을 옮겨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얼굴 근육은 그새 아래로 내려와 메마른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준비하고 출근길에 오르고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일상적인 날들이 여러 번 흘러갔다.
해가 바뀌고 그 전보다도 더 지독한 업무량에 정신이 없어졌다. 분기별 업무가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생각할 때쯤 기존 업무에 시간과 질적인 양을 갈아 넣어야 하는 업무들이 추가됐다. 버거운 일상이 시작되자 환경도 더 사나워졌다.
그 시작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