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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언어영역

[어른이도 찡찡대고 싶어요] 공기로 흩어질 말

by Pabe
잘 듣고 문제의 답변을 고르시오


어른은 대놓고 싸우지 않는다. 말로 싸우지. 흔히 기싸움 정도.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들리는 말들이 있다. 평소라면 그냥 썼을 단어들도 상황과 어투에 맞물려 다른 뜻을 담는다. 예의를 차린 듯 차리지 않은 듯, 비꼬는 듯 아닌 듯 묘한 말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말이 트인다. 귀가 트인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를 쓰는 회사까지 들어간 사람이 여기서 어떻게 더 귀가 트일 일이 있겠나 싶지만 신기하게도 그렇다. 이전 같으면 내포된 뜻은 모르고 직독직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귀가 트여 속뜻이 말로 들리는 경지에 오르는 때가 온다. 회사인 언어영역이라고 하는 학문이 있다면 그 내용은 직종의 전문성을 높이는 지적인 용어 기반이 아닌 진짜 뜻을 담고 있는 언어가 따로 존재하고 있었을 줄은 나도 익숙해질 때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 번 트이기 시작하면 계속 풀이 해석된 말로 들린다는 점이다. 들리기 시작하게 되면 말의 목적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대체로 담당 업무 외의 업무를 떠맡기려 하는 경우나 특정인을 꾹꾹 누르고 싶을 때 자주 활용되고는 했다. 알고 싶지 않은 상사의 인간관계가 이 순간 가장 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어른스러운 어투의 비꼬는 말이 계속되고 짜증이나 화를 내기 시작하면 또 시작된 하루 일과처럼 생각하기만 했다. 그런데 반전이라면 반전일까. 상사에게도 상사가 존재해서 위에서 들은 말은 고스란히 아래로 흘렀다. 하루 24시간 중 많이 보는 사람들이다 보니 영향을 안 받는다면 어려운 일이지만 화풀이는 너무 쉽게 아래로 향하고 가장 만만한 상대를 물색한다.


한 번은 업무에 필요한 물건이 없어져서 찾아야 한다고 하기에 함께 찾으러 갔다. 물건이 어떤 모양이며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잃어버린 것이어서 모르겠지만 찾는 인원이 많으면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이상하게 그 물건 하나를 위해 몇 시간을 찾았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계속 둘러보다 보니 높은 곳에 있는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에는 없고 저거는 확인을 안 해본 것 같은데.'


그쪽으로 향했는데 상사가 다른 방을 가리켜서 그쪽에서 한참 뒤적이고 있는데 상사가 그 상자를 꺼내 들었다.

"여기 있네!"

그 한마디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말투에서 답답하다는 분위기가 풀풀 풍겨 났지만 말의 요점은 왜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냐는 말과 잘 정리를 해둬야 나중에 쓸 때 잘 찾아서 쓸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였다.


'그래, 매번 쓸 물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잘 두면 좋지.'


계속 쓸 물건이라면 잘 두는 것이 좋으니 그러려니 하기도 했고 이전의 일이었으니 그저 설명이라고 받아들였다. 한참의 설명 후 어떻게 되었든 물건을 찾았으니 됐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돌아가려는 찰나 함께 일하던 선생님이 나직이 이야기했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물건 어디 숨겨두고 찾는 거 시키려고."

설마 그러려고 일부러 정성스레 숨겼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컸지만 찾아다닌 시간이나 행동을 생각하면 아닐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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