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말하는 안정이라는 불안

[우당탕탕 설늙은이] 술 잘 먹을 관상은 어떤 관상인가요?

by Pabe
[ 우당탕탕 설늙은이 오디오북 ]


일을 하기 전의 나는 복싱을 해서 그간 쪘던 살을 10kg 정도 감량한 상태였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한결 가벼운 몸의 상태와 컨디션에 부담이랄 것은 하나도 없던 때였다.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도 살을 뺐던 생활방식을 잘 유지했었다. 11시에 잠을 자고 간식이 있어도 손도 대지 않았고 물을 잘 챙겨 마시는 건강한 어른으로 잘 가꿔나가고 있었다.


"술은 좀 할 줄 아나? 잘할 것 같은데."


처음 상사에게 술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대학에 들어가던, 회사에 들어가든 간에 술을 마시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병으로 인해 아프기 이전부터 술이라는 것은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인은 술을 해독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쪽에 속한다던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딱 나였다. 조금의 도수에도 몸살과 같이 몸이 아파오는 통증이 오기 때문에 먹을 것이 못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있어 술이란 쓰기만 하고 몸에는 좋을 것 하나 없는 액체로, 그것에 느껴지는 가치는 없었다. 술을 마시냐는 질문에 그간 들어온 말이 있었기에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먹을 수 없다는 걸 말해야 했으므로 부드럽고 조리있게 이야기했다.


"돌려 이야기하는 것 같이 들리는 게 술 안 먹으려고 하는 거야?"

"아아-, 아뇨. 술을 마시면 몸이 몸살처럼 통증이 곧바로 나타나서, 아파서 먹지 않습니다. 못 먹는 거죠."

"아! 그래. 그런 사람들 있다더라. 술 마시면 몸 아픈 사람들."


그제야 누군가가 보기에 술을 잘할 것 같이 보이는 나는 술에 대한 질문에서 해방되었다. 술을 마시면 진실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대학생의 로망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던 동기와 도수가 약간 들어있는 한잔을 끝으로 입에 대지 않았다. 즐거운 사람이야 즐겁겠지만 마시고 난 후 나타나는 통증은 오롯이 나 혼자 앓아야 하므로 즐겁지 않았다. 동기는 바에 나와 다른 동기들과 함께 가서 그 분위기를 즐기도록 했으나 그것 또한 내게는 기쁨보다는 부담이 되었다.


어째서 술에 대해서는 뺀다는 말 같은 게 붙을까. 안 먹으면 안 먹고 먹기 싫으면 싫은 거지, 꼭 그 말 끝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인지 명확한 사실을 이야기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점이 불쾌하다. 또, 잘 먹을 것 같은 관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파생된 것인지 알 길이 없으나 꽤나 불쾌했다. 그중에 제일 불쾌한 건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끝맺어지는 상황이었다. 질문에 적당한 답변을 내놓았으나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대화로 인해 느껴지는 오묘하고 부자연스러운 공기를 느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어봐서 답했을 뿐인데 이 텁텁한 공기를 느껴야만 하는 건가. 자신에게 맞춘 정답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라는 당연함만 생각해서 질문도 아무렇지 않은 거겠지?'


애초에 술로 맺는 유대라는 건 도대체 뭘까. 그게 뭐기에 열아홉 살 학생신분이 막 끝난 어른과 직장인들에게 필수코스인 것처럼 이미지를 쌓아 올린 것인지. 남들은 다 취해 있는데 혼자 멀쩡한 정신으로 자신을 보는 것에 꺼림칙해했던 동기의 생각과 태도도 이해할 길이 없다. 한 해를 지났을 뿐인데 어른의 친해진다는 단계는 꽤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다. 어른이라는 단계를 밟는 과정은 서로가 서먹해지기부터 해야 하나. 그래야 술을 이용해 친해질 수 있으니까? 술을 함께 나누고 마시면 친해진다는 건 되려 이제껏 성장단계에서 배웠던 방식과는 다르지 않나.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사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수많은 질문과 질문을 받고 술과 친해지도록 그런 환경에 노출되도록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굳건히 나는 나를 지켰다. 그러면 나의 단호함에 상대방의 아쉬운 말과 언짢음 같은 것들이 따라온다. 한국에서 친해진다는 단계를 밟을 때 술은 오작교 같은 지위를 뽐낸다. 내가 그것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에 처음에는 아쉬워하고 끝에는 언짢아하는 것이라는 걸 안다. 그들의 행동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저 친해지고 싶다는 이유 아래에 행해지는 무지다. 스스로 무슨 행동을 하고 말하는지 모른다는 걸 안다. 알고 있기에 내 나름의 설명을 상세히 전달한다. 그것만이 내가 술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친함이다.


타인이 보기에 술에 대한 나의 태도는 그들이 모르기에 더 견고해 보일 것이라는 것 또한 안다. 아프다는 것을 일찍 경험하게 된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둔한 내가 미리 경험했다고. 남들보다 둔하니 좀 더 빨리 경험하게 된 것이라고. 나이가 들면 모두가 어디 하나씩 아프기 마련인데 그때 가서 내 둔함과 우선순위에 밀려난 몸의 아우성을 마주하게 된다면 더 크게 마주하게 될까 봐 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언제든 술 앞에서 완강함을 보일 것이라는 걸 다짐한다. 어차피 술맛이라는 것도 모르니 내게는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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