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여행 첫날의 고난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스위스 코티지에 있는 호스텔을 예약했었는데 역에서 내려 아무리 걸어도 이놈의 호스텔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되기 전이었다. 네 명 중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구글맵도 별로 정확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전화기로 지도를 본다는 발상도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이 지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호스텔을 찾고 있었다.
이미 컴컴해진 밤,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유럽의 타국에서, 내 위치가 표시되지도 않는 종이 지도로 말이다. 게다가 가랑비로 내리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지쳤으나 긴장을 풀 수도 없어서 넷이서 막막하게 영국의 주택가를 떠돌던 기억이 난다. 좌절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사실 그 와중에도 신이 났다. 나름대로 중산층에 속하는(걸로 생각되는) 스위스 코티지 지역은 깨끗하고 멋진 주택이 늘어선 동네였다. 집 하나 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쁘던지.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주택가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한국식 빌라도, 아파트도 없었다.
거의 한 시간은 족히 헤맸던 것 같다. 기억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기에 넉넉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소심함과 체면을 집어던지고 행인들 중 아무에게나 길을 묻기 시작했다.
비 오는 밤에 조그만 아시아 애들 네 명이 영국 주택가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 불쌍해 보였는지, 산책을 하던 백인 부부가 우리를 도와주었다. 사실 그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아니라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였나 오스트리아였나, 그런 나라에서 왔다고 했던 것 같다(아닐 수도 있다). 여하튼 그들은 이십 여분 정도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고, 이쪽 길 저쪽 길로 가 보고 하다가 어느 길인지 찾아냈는지 제법 정확한 위치를 일러주었다. 그들이 알려준 대로 가 보니 정말 숙소가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천사라고 불렀다.
신기한 것은 이후에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천사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꼭 한 도시에 한 명씩 천사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발을 디딘 완전한 타지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할 때 그런 도움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는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닌데 천사들을 만났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 누군가가 보여준 따뜻한 마음은 내 마음에도 남는다. 쭉. 흐릿해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나중에 우리가 여행에 익숙해지고 웬만한 어려움쯤은 어느 정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자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이 나타나는구나, 싶었다. 아쉽게도 내가 천사 노릇을 할 기회는 여태껏 없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쓸 수 있어서 낯선 이의 도움이 별로 달갑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 볼 수 있다면 기쁠 거다.